▲ 경주 시작을 알리는 안내가 나오자 서울경마공원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스크린으로 쏠린다. 한계희 기자

#1. “경주 5분 전입니다. 마권 구매 확인하세요.”

지난달 17일 오후 5시59분 서울경마공원. 스피커에서 경주가 임박했다는 얘기가 들리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진다. 발매창구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다. 17번째 경기. 오늘의 마지막 경기다. ‘동반자’ 입장, ‘삼정불매’ 입장. 이날 출전한 말 11두가 트랙에 등장했다. 기수는 천천히 말을 몰아 1천200미터 트랙을 돌며 컨디션을 점검한 뒤 출발선에 섰다. 곧 경주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마감 3분 전, 마권 구매를 서둘러 주세요.”

다시 스피커에서 투표(마권 발매) 종료시간을 알리자 텅 빈 관중석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트랙 앞에도 뜀뛰는 아이들, 팔짱 낀 연인 한 쌍이 자리를 잡는다. 야외 관중석은 듬성듬성 사람의 머리가 보이지만 긴 통로(100미터 넘는) 같은 홀은 인산인해다. 경기시작 30초 전을 알리는 안내가 나오자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쏠린다. 드디어 경주 시작. 야외 대형 스크린에 관중석 반대편 출발선을 비췄는데, 얼마 안 돼 경주마는 반 바퀴를 돌아 눈앞에서 엎치락뒤치락 달린다.

“가자!”, “달려!” 함성과 박수 소리도 잠시. 곳곳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에잇”하며 마권을 찢어 던지는 사람도 보였다. “큰 거 잡았다”며 소리친 중년남자는 주위의 부러운 시선을 받았다. 이날 우승한 11번 말 ‘스마티’가 결승점에 들어온 시간은 출발한 지 1분13초 만이다. 16번째 경주가 끝나고 17번째 경주 시작까지 30분을 기다린 것치고는 그야말로 촌각의 시간이다.

#2. 경주마가 달리기 시작하면 미친 듯이 찍어 대던 마권으로부터 잠시 해방이다. 옆에는 수백 만원의 현금 다발이 쌓여 있다. 시재를 맞춰야 하니 현금 다발은 일더미다. 잠시의 해방감은 사치다. 말이 달리고, 순위가 확정되는 동안 발권액과 돈의 액수를 맞춰 보는 작업을 한다. 액수가 다르면 차액만큼 물어내야 하니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돈다발에서 묻어 나온 때라도 씻어 내려면 5분 안에 시재 정리를 마쳐야 한다. 바로 환급하러 손님들이 몰려올 판이다. 횡재했거나 적어도 손해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 돈을 되돌려 받으러 오는 탓에 얼굴 붉힐 일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시재 맞추기와 환급을 마치니 10분이 지났다. 경주와 경주 사이는 점점 짧아져 요새는 25~30분이다. 곧 경주 15분 전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올 것이다. 한두 명 오던 손님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경마 시작시간에 가까워질수록 마권 구매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사람들이 예시장을 확인하고, 배당판을 보느라 베팅을 최대한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 예시장은 출주마의 건강상태나 걸음걸이를 관찰해 우승마를 예상할 수 있도록 말들을 미리 선보이는 장소를 말한다.

1분, 30초, 20초…. 마감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서로 마권을 찍어 달라고 밀치고 소리치고 욕한다. “한 경주당 50억원의 매출이 있다면 그중 30억원은 마지막 5분 안에 일어납니다.” 입사 30년이 넘은 매니저 노동자의 말이다.

서울경마공원은 일확천금의 욕망이 넘실대는 곳이다. 그 한쪽에 커튼으로 가려져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발매창구가 있다. 조그만 창문 틈으로 여성 발매원이 얼굴을 내민다. 수천 명의 사람들로 가득한 홀과 커튼 속 발매창구는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다. 숨 쉴 틈 없는 긴장감이 그렇고 오래 머물러 있어도 풍족해지지 못하는 현실이 그렇다.

여기서는 ‘중독’ 같은 말로 표현되는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아니라 커튼 속 발매노동자의 얘기를 하려 한다. 수십 년을 같은 직장에서 일해도 아르바이트 대접을 받는, 혹시 퇴직금이나 주휴수당을 주게 될까 봐 회사의 의지대로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 얘기다. 바로 공기업 한국마사회의 PA(공원도우미·Park Assistant)다.
 

 


“30년 일했는데 알바라고 무시”

“진짜 사람대접 안 하고 죽이겠다는 생각 아닙니까.” 경기도의 한 지점(장외 발매소)에서 30년 넘게 일한 황미숙(56·가명)씨는 울분을 토했다.

“15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납니다. 회사에서는 딱 3년까지 일하는 사람만 필요하지 오래 근속할 필요는 없다는 말까지 합니다. 하루 매출 1억원이던 회사를 30년 만에 700억원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가 도운 부분이 있을 텐데. 무시당하는 걸 생각하면….”

노동법에서 15시간은 중요한 기준 시간이다. 1주 동안 일한 시간이 15시간 미만이라는 얘기는 곧 유급휴일과 연차유급휴가(근로기준법)를 받지 못하고, 퇴직금(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지급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15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는 황씨의 말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러면 “못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마사회는 서울경마공원과 부산·경남경마공원, 제주경마공원 3곳에 경마장과 지점으로 불리는 장외 발매소 30곳을 운영하고 있다. 경마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 동안 오전 11시부터 오전 6시~6시5분까지 열린다. 하루 7시간이 넘는다. 사흘 동안 경기시간만 21시간이다. 발매원들이 경기시간만 일한다고 치더라도 근무시간이 21시간이다.

15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사회가 쓰는 방법은 근무시간 쪼개기다. 금요일 하루 근무자와 토·일 이틀 근무자로 나누는 것이다. 이러면 하루 근무자는 7시간, 이틀 근무자는 14시간으로 근무시간을 제한할 수 있다. 근무시간 쪼개기로 15시간 미만을 근무하는 시간제 경마직(PA)은 7천261명이나 된다. 이 중 질서유지·안내·주차관리 등을 제외한 발매직이 3분의 2가량을 차지한다. 이틀 근무자는 3천500여명 수준으로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꼼수1. 초단시간 유지 '근무 날짜 쪼개기'

그런데 노동자들이 실제 근무하는 시간, 즉 경마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경마가 열리는 시간 외에도 1시간30분 이상 길다. 이틀 근무자는 이럴 경우 15시간을 훌쩍 넘긴다. 마사회에 따르면 서울경마장에서는 토요일(11~12경기)·일요일(11경기), 부산경마장에서는 금요일(10~11경기)·일요일(6경기)에 경기가 열린다. 제주경마장은 금요일 9경기, 토요일 9경기를 치른다. 마사회는 각 경마장의 경마시간을 조정해 서로 겹치지 않게 교차시킨다. 경마장에서 열리는 경주는 장외 발매소에서 실시간 방송된다. 이원방송처럼 3곳에서 열리는 경기가 스크린에서 중계되는 것이다.

경마장을 찾은 사람들은 첫 경기 시작 20분 전부터 발주 직전까지 베팅한다. 이를 역순해 나가면 노동자들의 출근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 오전 11시40분 발매를 시작하기 20분 전에 PA들이 ‘조회’라고 부르는 CS(고객만족) 교육을 한다. 물론 조회 전에 유니폼을 입고 있어야 한다.

별일 아닌 듯 싶지만 준비사항이 꽤나 까다롭다. 마사회가 지난해 PA 교육자료로 사용한 ‘KRA서비스 매뉴얼’에는 인사 방법부터 용모·복장, 표정과 미소, 자세와 동작, 목소리 톤까지 지정하고 있다. 용모와 복장에는 머리모양이나 액세서리·화장·손톱 모양 등의 표준이 제시돼 있다. "검정 끈으로 양쪽 귀가 보이도록 묶은 후 망을 씌운다"든지 "기본 바탕화장에 붉은 계열의 립스틱을 바른다"는 식이다. 발매노동자들은 15분가량 걸린다고 얘기한다.

수납원은 수천만원의 현금(경마전도금)을 받아 층별로 분배하는 일도 마쳐야 한다. 출근시간은 경마 시작 최소 1시간 전으로 앞당겨진다.

꼼수2. 시간제 '인사관리규정 개정하기'

퇴근시간도 마찬가지다. 오후 6시나 6시5분에 시작한 경기는 비디오 판독까지 거쳐 최종 순위가 확정될 때까지 최소 7분이 걸린다. 순위가 확정되면 이른바 잭팟을 터뜨린 사람들이 환급을 받으러 온다. 그 뒤에 발매원이 현금시재를 맞추고, 다시 층별 수납원이 시재를 확인하면 총수납원이 마지막 시재확인을 한다. 그때까지 모두 대기한다. 이렇게 모든 작업을 마치면 40~50분이 흐른다. 퇴근시간은 오후 6시40~6시50분이 된다.

결과적으로 발매원들은 오전 10시 이전에 출근해 오후 6시50분에 퇴근한다. 경마장에 있는 시간이 8시간50분을 웃돈다. 점심시간 40분을 근무시간에서 제외하더라도 주당 근무시간이 16시간을 웃도는 셈이다.

마사회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확보한 2010년 이전 ‘PA 근태관리 지침’에 따르면 출근시간은 ‘제1경주 발주시각 1시간 전’이었다. 발주시각이 오전 11시였으니 출근시간은 10시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2011년 PA 근태관리 지침’에서는 출근시각 대신 '근무개시시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제1경주 발매시작 10분 전'으로 바뀌었다. 1경주 발매시각이 오전 10시40분이니 출근시간을 10시30분으로 정한 것이다.

마사회는 지난해에는 근태관리 지침에서 근무개시시간을 ‘제1경주 발매시작 20분 전’으로 개정했다. 근태관리 지침 개정은 2011년 PA 운영과 관련한 실태조사 결과 이틀 근무자의 경우 15시간 미만 근무를 준수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데서 비롯됐다. 마사회는 근무개시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휴게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근로시간에는 휴게시간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말에는 ‘시간제 경마직 인사관리규정’을 개정해 "경마직의 근무시간을 1일 7시간30분 미만으로 주당 15시간 미만을 원칙으로 한다"는 조항을 새로 만들었다. 근무 시작시간은 첫 경주 발매시작 20분 전, 종료시간은 마지막 경주 출발 후 30분으로 명시했다. 휴게시간은 점심시간을 포함해 최소 40분 이상을 근무시간 도중에 부여한다는 조항도 넣었다. 실제 근무시간이 어떻든 계약서는 주당 15시간 미만으로 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꼼수3. 휴게시간 늘려 '근로시간 줄이기'

마사회는 근무시간을 줄이는 방안을 찾아냈다. 휴게시간을 늘리는 방식이다. 점심시간을 포함한 휴게시간은 2011년 이후 세 번이나 변경됐다. 발매노동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2011년 2교대가 도입되고 지난해 6월에는 3교대가 시행되더니 올해 6월에는 다시 2교대로 돌아갔다. 2011년 이전에는 점심시간 20분이 휴게시간의 전부였지만 올해는 점심시간 45분을 포함해 휴게시간이 120분으로 늘었다. 물론 ‘억지 춘향’이다. 금요일에는 15~16경기,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16~17경기가 열리니 경기 사이 시간은 25~30분에 불과하다. 점심 먹을 시간도 제대로 없는 형편인데 휴게시간은 언감생심이다.

점심시간 변천사는 이렇다. 2011년 도입된 2교대는 발매원을 2개조로 나눠 한 조가 12시부터 12시30분까지 열리는 경기 동안 점심식사를 하고, 다음조가 오후 12시30분에서 오후 1시까지 경기 동안 식사를 하는 방식이다. 두 경기에 한해서만 발매시간을 7분으로 줄이는 방식이었다. 지난해에는 3교대가 시행되면서 3개조가 3경기에 걸쳐 40분 동안 식사를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발매창구 3분의 1을 닫아 놓자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때문에 올 들어 2교대로 바뀌었다. 한 개조가 25분 동안 밥을 먹은 뒤 5분 동안 표를 팔고, 다시 20분 동안 나머지 식사를 마치면 다음 조가 같은 방식으로 점심을 먹는다. 발매노동자의 표현대로 “밥을 입에 물고 표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다.

마사회도 일련의 제도 변화가 15시간 미만 근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한다. 마사회 홍보실 관계자는 “15시간 미만으로 맞추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고용하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에서 경영 효율성을 많이 따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PA가 7천명 정도 되는데 이를 다 풀타임으로 고용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덧붙였다.

마사회 무리수, 곳곳서 파열음

마사회는 비정규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마사회에서 일하는 직접고용 비정규직과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8천538명이다. 정규직 851명의 꼭 10배다. 그중 단시간 노동자가 7천261명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15시간 미만 일하는 노동자다. 1천158명인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이미 국회에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산재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올해 국정감사에서 비판이 집중됐던 마필관리사 문제, 평균 노임단가를 최저임금으로 설계해 다른 기관의 청소용역보다 임금이 낮아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시정을 권고받은 청소용역 문제는 그나마 탈출구라도 찾았다.

절대 다수인 단시간 노동자 처우 문제는 탈출구 없는 시한폭탄이다. 이들 단시간 노동자들은 2000년 ‘고용직’에서 시간제 경마직으로 전환되면서 호봉과 퇴직금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2000년에 들어온 사람이나 지난해 들어온 사람이나 하루 급여는 교통비·식비를 포함해 6만4천원으로 같다. 비슷한 직종인 경정·경륜에는 주 2일·3일·5일 근무제가 있고, 주 2일 근무자도 15시간 이상 근무시간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불만이 고조되면서 지난해 6월 시간제경마직노조가 생겼다. 상급단체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생긴 노조에는 2천700여명의 조합원들이 가입했다. 최근에는 단체교섭 과정에서 사용자의 안하무인 격 태도를 비판하며 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신청을 냈다. 올해 초부터는 지난해 퇴직한 노동자 23명이 제기한 퇴직금 소송이 진행 중이다. 15시간 미만 계약과 실제 근로시간이 다르다는 게 원고들의 주요 주장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박근혜 정부가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추진한다고 하는데 마사회 같은 공기업조차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초단기 미니잡을 만들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마사회 사정에 정통한 한 공인노무사는 “7천명 시간제 중 3천명 이상은 1년 내에 이직한다”며 “외부적으로는 고용을 창출했다고 데이터를 만들어서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나쁜 일자리로 분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사회가 15시간 미만 초단시간제를 사용하면서 비용도 줄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좋아할지 모르나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핵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계희 기자

구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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