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직원들과 함께 극장에 가서 <또 하나의 약속>을 봤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고요.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습니다. 화면에 근로복지공단 로고가 자꾸 보이는데…. 우리 공단이 근로자들을 위해 산재보험을 운영하는 조직이잖아요. 영화에서 공단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돼 안타까웠습니다. 산재판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재갑(56·사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의 말이다. 이재갑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7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 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공단 본부에서 진행됐다.

공단은 지난해 11월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자 고 김경미씨에 대한 서울행정법원의 산재인정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한 상태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의 행정소송 과정을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관객들로 하여금 공단의 산재 판정기준과 절차가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공단이 산재소송에서 산재근로자와 유족들을 상대로 항소와 상고를 자주 했던 그간의 관행도 이러한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배경이 됐다.

이 이사장은 “다른 소송과 달리 산재소송은 산재신청이 불승인된 근로자가 소송당사자라는 점을 유념하고자 한다”며 “무분별한 상고를 제한하기 위해 그동안 송무담당 직원들에게 지급해 온 승소포상금을 올해 상반기 중에 폐지하고, 1·2심 모두 패소한 사건에 대해 상고를 제기하는 경우 공단 본부로부터 사전지휘를 받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했다”고 밝혔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 봤다. 마음이 무거웠다”

- 공단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의 산재를 인정한 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하기로 결정하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국가를 대신해 산재업무를 처리하는 공단은 사회적으로 산재판정을 정확하게 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또 다른 측면에서 공단의 처분에 대해 소송이 제기되면 패소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을 받는다.

내용적으로는 1심 판결이 해당 근로자가 발암물질에 노출됐다는 객관적 사실보다는 추정적 판단을 하고 있어 상급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필요가 있었다. 또 거의 동일한 법적 쟁점을 갖고 있는 선행 소송에 대한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어 검찰의 지휘를 받아 항소하게 됐다.

이 밖에 공단에 제기된 삼성반도체 관련 사건 중 유방암과 재생불량성빈혈(무형성빈혈)에 대해서는 업무와의 연관성을 인정해 산재로 판정한 바 있다.”

- 산재를 당한 근로자나 유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가 바로 ‘입증책임’ 이다. 자신들이 어떤 유해물질을 다루는지조차 모르는 근로자들이 직업병을 증명해 내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나.

“근로자들이 어떤 부분을 어려워하는지 알고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근로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도 있었고, 국회의 입법발의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리는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서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용자의 산재 입증방식을 도입했던 스웨덴이 산재보험 재정고갈 등 부작용에 직면해 제도를 폐지한 예도 있다. 따라서 근로자의 산재 입증책임을 경감하는 방안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공단은 이 같은 대책의 일환으로 재해조사 직원을 증원해 현장조사를 강화하고, 조사 실적을 소속기관 경영평가에 반영할 계획이다.”
 

▲ 정기훈 기자


“공단의 무분별한 상고 제한하겠다”

- 특수고용직 6개 직종에 대해 산재보험이 적용되고 있지만 ‘적용제외 신청제도’ 탓에 실효성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적용제외 신청사유를 제한하는 내용의 산재보험법 개정안 처리가 유보됐는데.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은 고용노동부의 소관업무이기 때문에 이번 논의 과정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산재보험 적용업무를 담당하는 공단 입장에서 보면 적용제외 신청제도 때문에 그동안 상당수 특수고용직이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이번에 다뤄진 적용제외 신청사유를 제한하는 방식은 대단히 적절한 입법방향이라고 본다.

보험업계는 오래전부터 민간 상해보험과 산재보험을 비교해 왔다. 그런데 이 둘은 비교대상이 아니다. 민간 상해보험의 보장범위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를 가지고 공적 사회보험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 해당 법률안이 법안심사제2소위로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엔 합리적 결론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 사회적으로 자살 문제가 심각하다. 공단은 지난해 코레일의 과도한 징계 스트레스로 자살한 기관사에 대해 산재승인을 했다. 정신질환의 산재 여부를 판단하는 공단의 기준은.

“정신질환과 관련해 과학적으로 원인적 연관성이 비교적 명확하게 규명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지난해 산재보험법 시행령의 인정기준에 반영했다. 그 외의 정신질병은 사안별로 인과관계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정신질환 산재 신청건수는 최근 2년간 평균 125건이다. 이 중 3분의 1(33.5%) 가량이 산재로 승인됐다.

공단은 2006년 전문가 자문을 바탕으로 ‘정신질환 업무관련성 조사 실무지침(지침 2006-19)’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현행 지침의 분량이 지나치게 많고 복잡해 현장에서 활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정신질병의 업무관련성 판단’ 관련 연구용역을 완료했다. 앞으로 정신질병 유형별 세부 재해조사시트를 마련해 조사와 판정의 객관성을 높일 계획이다.”

- 장시간 근로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법원이 교대제 근무자의 수면장애와 불안장애를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현행 산재보험법 질병 인정기준에는 이러한 질환에 대한 판단기준이 없다.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법원은 최근 장기간 야간 교대근무에 종사한 근로자의 수면장애를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했다. 우울증 등 정신질병이 있는 상태에서 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경우 2차적으로 수면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법원의 판례 취지를 반영해 정신질병에 대한 조사지침을 정비하고, 의학적 연구와 판례가 축적되면 인정기준에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 정기훈 기자


“특수고용직 ‘산재보험 적용제외 사유’ 제한해야”

- 그동안 공단은 통근버스가 아닌 근로자 소유의 통근수단을 이용하다 사고가 난 경우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공무원과의 형평성 문제를 야기한다. 개선해야 할 것 같은데.


“현행 법령상 출퇴근 재해는 통근버스를 이용해 출퇴근하던 중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 한정적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공무원연금법이나 사립학교교직원연금법은 출퇴근 재해를 공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있고, 출퇴근 재해를 산재로 인정하라는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도 있었다. 이미 일본·독일·프랑스 등 선진국은 출퇴근 재해에 대해 보상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법원이 출퇴근 재해의 인정범위를 넓게 해석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공단은 출퇴근에 이용하는 교통수단과 경로의 선택이 제한된 상태에서 사고가 난 경우 산재로 인정하는 내용의 지침을 시달한 상태다.”

- 공단 본부가 이달 중 울산혁신도시로 이전한다. 올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험인 산재보험이 도입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본부 인원 400여명이 울산으로 내려간다. 우선적으로는 조직이 빠르게 안정화되도록 노력하고, 직원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애쓸 생각이다.

게다가 올해는 산재보험이 도입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공단의 비전을 재정립하고 산재보험의 다양한 발전방향을 모색할 때라고 생각한다. 산재보험의 수혜대상을 특수고용직 등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계층으로 확대하고, 인구고령화 시대에 산재보험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건강보험이나 국면연금과의 연계를 확대해 나갈 것이다.”

글=구은회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이재갑 이사장은

서울 인창고와 고려대 행정학과를 나왔다. 행정고시 26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미국 미시간주립대 노사관계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용노동부 국제협력국장·국제협력관·노동시장정책관·노사정책실장·고용정책실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정통 관료 출신이다. 2012년 6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노동부 차관을 지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