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노동시장 구조개혁 내지 노동개혁이 이른바 개혁정치(reform politics)의 중심에 부상해 있다. 그 핵심은 청년일자리 창출에 맞춰져 있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개혁의 방법론을 구축하는 작업은 일단 원인진단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모든 사회문제에서 그 원인을 진단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사회관계 그 자체도 그렇고 원인요인들 간 상호작용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원인을 두고 그것이 결정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선택(political choice)이 돼 버린다.

그러다 보니 결국 미래를 어떻게 구상하면서 누구의 이해를 중심에 두고 나아갈 것이냐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현재의 문제적 상황을 초래한 원인을 해석하는, 일종의 목적론적(tautological) 원인진단을 행할 여지가 크다. 그것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고 이해편향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혁정치는 자주 과학적이라고 보이는 옷을 몸에 걸치곤 한다.

민주사회에서 개혁의 칼을 준 주체는 문제의 원인에서부터 도입하고픈 해법, 그리고 그 예상효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서사적 논리구조를 갖춘 시나리오를 대중설득의 수단으로 갖춰야 한다. 한 편의 픽션 드라마는 그렇게 과학의 옷을 입고 정치의 품에 안기곤 한다. 그러한 드라마에서는 한때 우리네 노동정치 담론장의 중심에서 회자됐던 ‘100만 해고대란설’과 같은 코웃음칠 논리도 엄숙한 얼굴을 하고 무대에 올려지기도 한다.

지금 정부는 청년고용 진작을 내세우며 한 손에는 임금피크제를, 다른 한 손에는 일반해고의 도입(해고요건 완화)의 칼을 들고 나섰다. 대중들에게는 한마디로 청년실업 상황이 안 좋으니 중고령자들이 임금의 일부를 반납하고, 정규직들 전체가 고용안정을 반납하고 잘릴 위험을 더 감수하라는 말로 들린다. 그들은 과연 이러한 식으로 청년실업 문제가 얼마나 해소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며 정부의 진정한 의도(intention)를 추측해 가며 갸우뚱하고 있다. 그 개혁의 직접적인 대상자들은 억울하고 두렵고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여기에서 각 방안의 실효성은 차치하고 최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개혁의 큰 그림, 그랜드 비전, 청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과제라는 것은 대다수 국민이 동감하리라 본다. 그 이유는 객관적으로 새로운 거시사회적 및 거시경제적 다이너미즘에 지금의 노동시장이 부조응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오늘날 우리의 노동시장은 저출산·저성장·고령화와 서비스산업 부상 등 현재를 규정하는 새로운 인구-산업적 특성요인들을 염두에 두면서 구축된 질서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청년고용 문제를 위시해 고령자들의 노후대책, 그리고 여성들의 고용과 사회적 자아실현 등 여러 가지 굵직한 정책과제들이다.

개혁의 방정식은 결코 단순치 않지만, 그 절박성은 매우 크다. 이럴 때일수록 이해갈등이 첨예해지고 사회통합의 원칙이 중요하다. 어느 사회적 약자의 차단된 이해실현을 위해, 누가 어떤 기준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희생부담의 결정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나아가 그러한 희생으로 도입되는 새로운 정책이 실효성 있는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실행전략이 요구되는 것인지…. 논의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때 개혁의 예술가들은 누군가의 중장기적인 이해들을 간파해 크고 작은 윈윈의 기회를 최대한 만들어 내야 하고, 그것에 사회적 주체들의 의지를 모아 내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러한 중차대한 과제를 하루아침에 풀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또 심도 있게 진중한 논의의 장기지속이 결여된 상태에서 특정한 정책만을 찍어 그게 답이라고 강요하는 태도도 문제다. 그것들은 또 다른 더 큰 문제를 야기시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개혁으로부터 우리의 미래를 멀어지게 만들 공산이 크다.

임금피크제 도입이나 해고규제 완화 등은 그 계급적 편향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추진 방식에 있어서도 지금과 같아선 민주성의 함도가 심히 결여돼 있다. 더불어 개혁의 효과에 있어서도 그것들이 청년고용의 신장에 얼마나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 것인지 명확한 상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전체 노동시장의 총체적 개혁의 비전 속에서 그것들이 어디에 위치하는 것인지, 그로 인해 침해당하는 이들의 이해는 어떤 식으로 보상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랜드 비전이 없어서 그런 거다.

정부의 참 의도가 무엇이든 일단 ‘강요된 희생’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으며, 민주사회의 대중으로서 그에 대해 저항으로 화답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지난해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위해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시작했던 것은 일단 잘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내부에서의 논의가 ‘강요된 희생’의 수용 여부로 귀결되고, 그것의 수용을 놓고 줄다리기하다가 3개월 만에 협상을 접은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논의의 장이 국회로 바뀐들 다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를 가동한들 그러한 식의 태도가 유지된다면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그저 갈등의 화로 밑에 마른 장작만 더 쑤셔 넣는 격이다.

문제는 방법론만이 아니다.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그랜드 비전의 결여야말로 더 심각한 문제다. 한때 정부가 ‘고용률 70%’를 이야기했던 시기가 있었다. 어설펐지만 그나마 그랜드 비전을 만들어 가려나 싶었다. 불과 2년 전 일인데도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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