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서명하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

경북대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수간호사가 최근 일반 간호사들을 불러 놓고 한 말이다. 이 수간호사는 병원 탈의실에 일반 간호사를 한 명씩 부른 뒤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서명하지 않으면) 너 때문에 임금을 손해 본다”며 취업규칙 변경 동의서명을 강요했다.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과정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촌극이다.

민주노총 주최로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폭로 증언대회’에서 최근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법적인 취업규칙 변경 사례가 공개됐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94조는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 과반수 노조 또는 근로자 과반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위법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 증언대회 참가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정부가 위법행위에 대한 근로감독을 방기한 결과다.

◇근기법·단협 무시는 기본=서울대병원은 임금피크제 도입 과정에서 노조와의 교섭을 거부한 채 근로자 동의절차를 강행했다. 동의절차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하는 온라인투표로 진행됐는데, 투표에 앞서 병원측은 ‘직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 “투표가 부결될시 내년 임금인상률이 25% 삭감된 상태에서 또다시 투표를 진행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동의서명을 유도했다.

문제는 투표 결과다. 전체 직원 6천45명 중 3천177명(투표율 52.56%)이 투표에 참여해 투표자 중 1천728명이 임금피크제 도입에 찬성했다. 전체 직원 대비 28.59%가 임금피크제 도입에 동의한 셈이다. 근기법에 규정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런데도 병원측은 “과반 투표, 투표자 과반 동의로 (변경이) 가능하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뒤 제도 강행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대병원분회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병원측을 근기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전남대병원은 한술 더 떴다. 전남대병원은 직원 동의절차를 아예 생략한 채 서면이사회 의결로 임금피크제 도입을 결정했다. 서명이사회에서 의결된 안건은 △임금피크제는 만 59세부터 퇴직예정일을 기준으로 1년간 적용하고 △임금피크제 해당연도 직원이 속하는 직종의 초임임금을 감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건의료노조 전남대병원지부는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 과반이 속해 있는 과반수 노조다. 게다가 전남대병원 단체협약은 “취업규칙을 조합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할 때에는 조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병원측은 근기법과 단협을 동시에 무시한 채 서면이사회에서 임금피크제 시행안을 날치기로 처리한 것이다.

◇노조 조합원에 피해 집중=이날 증언대회에서는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 완료된 사업장 사례도 소개됐다. 강화마루 생산업체인 한솔홈데코는 2012년 취업규칙과 급여규정 개정을 추진했다. 이른바 저성과자에 대한 징계를 강화하고, 인사고과 점수가 저조한 D등급자의 임금·상여금을 대폭 삭감하는 내용이다.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과정에서 회사는 직원들에게 이름·부서·직급이 명기된 동의서를 제시하며 O·X로 의사를 표시하도록 했다. 화학섬유노조 한솔홈데코지회가 취업규칙 변경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1·2심 모두 졌다.

일본계 다국적기업 이데카코리아도 2012년 노사협의회에서 성과급을 인사고과와 연동해 차등 지급하는 내용으로 취업규칙을 개정했다. 가장 높은 S등급 외에 A~G등급으로 인사등급을 나눴는데, 하위등급인 E·F·G등급 대상자의 76%가 노조 조합원이었다. 화학섬유노조 이데카코리아지회가 이 같은 인사고과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인사고과는 회사의 광범위한 재량권이 존재하는 영역”이라며 회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러한 사례는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가 요식행위에 그치거나, 노조 조합원에게 불이익이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노동자들이 기존 권리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용우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는 “고용노동부는 불법을 부추기는 취업규칙 가이드라인 제정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의 불법행위에 경종을 울려 현장의 혼란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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