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올해 4월1일 일본 전력산업이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돌입했다. 새로운 전력사업자가 4월 현재 200개 이상 난립해 경쟁을 하고 있다니, 언론의 호들갑 차원을 넘어 가히 전국시대라 할 만하지 않은가.

1951년 미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 9개 지역독점 민간전력회사로 출범한 일본 전력산업은 높은 전기요금으로 국민 불만이 높았음에도 일본의 전형적인 관료적 규제와 정책적인 보호 속에서 독점산업으로 성장했다. 화석연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섬나라 특성상 전력계통이 고립돼 있는 관계로 에너지 안보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90년대 이후 세계 여러 나라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추세 속에서도 제한적인 경쟁(제한된 지역 내 특정소비자 대상 경쟁체제) 정도만 도입하는 등 독점의 큰 틀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일본의 전력산업 정책을 급반전시켰다. 기존 지역독점 구조가 원전사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됐다는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면서 에너지 안보 등 독점체제를 유지할 명분이 약화됐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따라 기존 독점체제를 허물고 4월1일부터 전체 전기 소비자를 대상으로 전면적인 전력 판매경쟁을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전기소비자는 이제 지역을 막론하고 전기 판매회사가 제안하는 요금의 전기를 선택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4월 전면 자유화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200개 이상의 신규 소매사업자들이 설립됐다. 기존 전력회사들은 통신회사 등과 제휴해 결합상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터넷 상품, 휴대전화 요금과 결합한 다양한 전기요금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선보이며 경쟁을 주도하고 있다. 사철(私鐵)회사인 도큐전철 계열 전력판매회사인 도큐(東急)파워서플라이는 도쿄전력보다 기본요금이 저렴한 상품을 선보이면서 철도와 계열사인 슈퍼마켓에서 사용이 가능한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 상품도 선보였다. 예컨대 매일 7시 이전에 자사 전철을 이용하는 고객 중에서 자사 전기를 선택할 경우 매 탑승시 10엔의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 방식이다. 이 밖에 도시가스사업자와 일반 생활편의사업자도 전기판매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지자체 단위 시민전력회사, 생협 같은 소비자협동조합이나 태양광 같은 신재생에너지를 판매하는 사업자도 등장했다. 이들 사업자의 눈부신 활약(?)으로 4월1일 자유화 시작과 동시에 기존 지역독점 전력회사를 박차고 새로운 판매사업자로 갈아탄 소비자가 37만8천명이나 됐다. 주로 수도권과 간사이 지역 등 대도시 소비자들이 사업자를 변경(switching)하고 있지만 시작과 동시에 나타나는 변화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력의 ‘전국시대’라고 부를 만하지 않은가.

그동안 독점사업자였던 9개 전력회사는 발전부문과 송배전부문, 그리고 판매부문을 분할했다. 송배전부문의 경우 신규사업자에 대한 차별 없는 전력망 서비스를 제공하고 망 접속료를 받는 회사로 전환됐다. 최대 전력회사인 도쿄전력 또한 도쿄전력지주회사(도쿄전력홀딩스컴퍼니) 체제로 전환되면서 도쿄전력연료&화력·도쿄전력파워그리드, 판매회사인 도쿄전력에너지파트너 등 3개사로 분할됐다.

일본의 전면 자유화 경쟁은 원전에 대한 정책전환, 신재생에너지 확대, 상대적으로 높았던 전기요금 인하 등 대부분 긍정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의 지정학적 특성상 에너지 안보 문제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아울러 전력의 공급안정성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자유화 시작과 동시에 도매전력거래시스템이 8시간 동안 정지된 상황은 지엽적인 문제이며, 무엇보다도 지역별로 서로 다른 전력시스템(주파수·전압 등)의 연계와 복잡한 전력거래 문제로 전력네트워크 불안정성이 커질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경쟁이 심화할수록 중소규모 전력판매회사 도산과 대기업 시장지배력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도산에 따른 소비자 주권이 침해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새로운 전기 상품이 오히려 대량 소비자에게 유리한 제도, 즉 에너지 절약에 역행한다는 비판도 있으며 복잡한 요금으로 소비자를 혼란시키고 서비스의 가격체계를 왜곡시킨다는 주장도 있어 향후 자유화 결과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한국 정부도 한국전력 판매부문을 분할해 민영화하고 경쟁체제 전환을 추진해 왔으나 요금인상과 공급안정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공동연구단 연구 결과에 따라 중단된 바 있다.

그런 가운데 정부가 최근 에너지 공공기관 기능조정을 내세우며 한전 판매부문 개방과 경쟁체제 전환을 사실상 확정하고 구체적인 추진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지정학적 특성은 비슷하지만 공공독점과 규제, 그리고 전력의 사회경제적 중요성 등을 고려할 때 섣부른 민영화와 경쟁은 교각살우의 우를 초래할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일본의 추진 과정과 결과를 충분히 검토한 뒤 추진 여부를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전기는 인권이다. 소비자 선택권을 내세우며 국민 주권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peoplewin60@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