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민주노총이 주최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주관한 노동자 심리치유과정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5기 수료식. 참여자들이 수료증에 프로그램 참여 소감을 적고 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제공

“수료 축하합니다. 수료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 선생님 수료 축하합니다.”

지난 16일 저녁 서울 당산동 영등포산업선교회 2층 강당. 30여명의 사람들이 커다란 케이크에 촛불을 켰다. 수료 축하 노래를 부르고 다함께 촛불을 껐다. 박수를 치면서 서로를 안아 주면서 격려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주관한 민주노총 교육원의 노동자 심리치유과정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맘 프로젝트) 참여자들과 강사·스태프다.

이날 16명의 노동자·시민들은 지난 6주간의 치유 프로그램 마지막 수업을 들었다. 수료증을 받아든 참가자들은 밝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한 여성 참가자는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 오는 것조차 아프고 힘들었지만 차츰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며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밝아진 내 모습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 서경지부의 박종호(43) 조직부장은 “노조에서 일한 지 10년이 됐는데도 ‘왜 노조 일을 하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채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며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다 보니 '이것이 내가 노조활동을 하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아픔 드러내고 공감하면서 이뤄지는 '치유'

맘 프로젝트는 비영리 치유활동가 집단 '공감인'이 주관하는 서울시 '시민 힐링 프로그램'이다. 공감인은 각 기초자치구별로 시민들을 모집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민주노총 교육원은 해당 프로그램을 활용해 2014년부터 소속 활동가와 조합원을 대상으로 독자적으로 치유사업을 하고 있다. 16일 수료한 참가자들이 다섯 번째 기수다.

맘 프로젝트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참가자들의 사연을 미리 받은 뒤 동료 참가자들이 그 사연을 시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신을 드러내고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나도 사랑받고 존중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표다. 쌍용자동차 심리치유 프로젝트 '와락'으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만든 프로그램이다.

민주노총 맘 프로젝트 1기 과정을 수료한 뒤 지금은 치유·상담 활동가가 된 홍윤경 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선교부장은 “어디가 아프거나 힘든 사람만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며 “자신을 찾고 싶거나 타인과 공감하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맘 프로젝트를 권한다”고 말했다.

노동자 손잡아 주는 노동·종교·전문단체들

민주노총 교육원의 맘 프로젝트 외에도 전문인력을 갖춰 노동자들이나 활동가들의 치유를 돕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이 꽤 된다.

그중 종교단체들의 활동이 가장 눈에 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2011년부터 노동자들의 치유·의사소통·인성교육 프로그램인 ‘노동자 품’을 운영 중이다. 2014년부터는 집단 프로그램 강사·전문가 양성과정으로 활동 폭을 넓혔다.

향린교회 길목협동조합은 전문상담사들과 연계해 사회단체 활동가 개인상담을 실시한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는 2013년 노동자들을 위한 심리상담센터 '도반'을 개소해 상담사업과 템플스테이를 하고 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의 심리상담을 위해 출발한 와락은 2014년부터 치유단을 별도로 만들어 유성기업을 비롯한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까지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사회적기업을 지향하다 최근 비영리법인 전환을 앞둔 심리상담·힐링프로그램 전문기업 '마음의 숲'은 대기업·공공기관 노동자 심리상담과 노조·사회활동가·취약계층 상담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도움의 손길 기다리는 ‘한광호의 친구들’

노동계나 사회단체가 치유나 힐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노동계의 심리상담·치유 담당자들은 민주노총이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인성교육 강사과정을 개설해 운영한 것을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일상화된 고용불안과 비정규직 확대, 내부 정파갈등으로 지친 활동가들에 대한 ‘힐링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한 때였다.

가깝게는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심리치유를 위해 2011년 10월 경기도 평택에 문을 연 와락의 활동상이 알려진 것도 상담·치유사업에 대한 노동계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노동자 상담·치유사업의 필요성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노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처한 현실이 바뀐 게 없다는 방증이다. 24일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00일이 되는 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 조합원 고 한광호씨의 생전이 딱 그랬다.

고인은 2011년 5월 회사의 직장폐쇄 이후 계속된 노사갈등과 사측의 강압적인 노무관리 탓에 고통을 호소했다. 우울증 고위험군으로 분류돼 상담치료까지 받았지만 결국 세상을 등졌다.

충남노동인권센터 두리공감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유성기업 아산·영동지회 조합원의 43.3%는 우울증 고위험군에 속해 있다. 두리공감에서 상담을 받은 유성기업 노동자 사례를 보면 극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은 물론 자존감 저하와 배신감·고립감 등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노동자들이 많았다. 10여 차례 상담을 받았는데도 다시 우울증 고위험군으로 분류돼 또다시 상담을 받은 조합원들도 있었다. 어느 정도 치유가 됐는데도 사측이나 기업노조원들과의 갈등이 빈번한 환경에 노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충남노동인권센터는 2009년 1년 이상 장기투쟁을 벌인 지역 사업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상자의 42%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 유병률 고위험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일반인구를 대상으로 한 집단조사 결과(4%)보다 10배 이상 높았다.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에 대한 상담·치유 지원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와락치유단의 유금분 상담사는 “심리적인 문제는 모든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지만 집단적인 아픔을 겪은 노동자의 고통은 다른 노동자들의 몇 백 배, 몇 천 배에 이르는 데다, 병원을 찾을 여유도 없기 때문에 사회가 나서 치유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활동가들도 위험하다

이런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2008년 2월 민주노총에서 일하는 상근활동가 10명 중 2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된 적이 있다.

당시 논문을 작성했던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자는 “외환위기 이후 고용유연화가 가속화하면서 활동가들은 개인 업무능력을 넘어선 범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긴장을 풀 수 없게 됐다”며 “이런 현상과 노동운동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이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두 번의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노동계가 수세에 몰린 최근에는 활동가들의 정신적 고통이 커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활동가 상담을 주로 하는 길목협동조합에 따르면 활동가들은 분노조절장애·우울증·무기력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성이나 가족과 갈등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다.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도 강한 편이다.

채운석 길목협동조합 실행위원은 “활동가들은 과중한 업무에 압박을 받고, 더불어 관계형성에도 어려움을 겪는다”며 “누군가 그들의 얘기만 들어줘도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힘 모으는 관련 단체들 “인력·프로그램 공유”

장기투쟁 노동자들이나 활동가들을 위한 치유·상담 필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최근 관련 단체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민주노총 교육원·영등포산업선교회·와락치유단·마음의 숲·길목협동조합·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충남노동인권센터 두리공감은 다음달 1일 사회활동가와 노동자 심리치유 네트워크 ‘통(通)통(統)톡(talk)’을 출범시킨다.

통통톡은 각 단체들이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전문상담사들을 공유하고 연계할 예정이다. 보다 많은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단체마다 프로그램 내용과 상담 대상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 만큼 이를 네트워크로 모으면 도움이 필요한 노동자들에게 적합한 ‘맞춤형 상담·치유사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예컨대 단체별 전문성에 따라 집단·개인·현장방문 상담을 구분하고, 활동가·장기투쟁 노동자·감정노동자처럼 대상을 나눠 특성화된 상담·치유를 제공할 수 있다. 상담 공간도 공유하는 만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네트워크 준비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효열 와락치유단장은 “각 단체의 프로그램과 인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맞춤형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활동가들이나 노동자들은 주저하지 말고 일단 참여해 보길 권한다”고 말했다.

집단 치유 프로그램부터 개별상담까지

노동자 심리 치유단체들 "전화 한 통으로 연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치유사업을 하는 단체들은 사업 대상이나 방법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영등포산업선교회와 민주노총 교육원은 집단 프로그램에 강점이 있다. 참가자들을 직접 모집하거나 특정 노조의 요청을 받는 형태로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민주노총 교육원은 1년 두 번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이나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다. 2013년부터는 ‘몸의 지혜를 회복하는 트라우마 치유 워크숍’도 개최하고 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인성교육이나 의사소통과 관련한 집단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2011년부터 '노동자의 품'이라는 과정을 운영 중이다. 최근에는 노조활동가나 파업 중인 노동자, 감정노동자를 상대로 맞춤형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필요한 경우 와락치유단이나 길목협동조합에 개인상담을 연결해 준다.

집단 프로그램 강사와 전문가를 양성하는 프로그램도 관심을 끈다. 와락치유단과 마음의 숲, 길목협동조합은 전문상담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와락치유단은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요청이 오면 현장을 찾기도 한다.

길목협동조합의 '심심프로그램'은 사회활동가나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다. 해고자나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도 참여할 수 있다. 전화로 상담신청을 하면 세종로정신분석연구회 소속 상담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을 배정해 기본적으로 15~20회 상담을 제공한다.

마음의 숲은 기업심리상담 전문단체다. 기아자동차처럼 노사합의로 심리상담소를 운영하는 사업장에 컨설팅·상담을 지원한다. 감정노동 힐링프로그램도 갖추고 있다. 장기투쟁 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 노동자에게는 무료상담을 제공한다. 전국적으로 540명의 상담자풀을 갖고 있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심리상담센터 '도반'은 신청을 받아 개인·집단상담을 하는데,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템플스테이다. 올해 7월 월정사와 법주사에서 두 차례 무료 템플스테이가 예정돼 있다.

저마다 특장점을 가진 이들 단체가 다음달 네트워크를 꾸리게 되면 시너지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자들이 단체나 프로그램 선택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회활동가와 노동자 심리치유 네트워크 ‘통(通)통(統)톡(talk)’에 전화 한 통만 하면 된다. 네트워크가 당사자에게 가장 적합한 프로그램이나 단체를 연결해 준다.

상담·치유 활동가들은 “고통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누군가에게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트라우마가 있는 노동자·활동가뿐 아니라 자신과 주변을 한 번쯤 돌아보고 싶은 이들은 지금이라도 전화 다이얼을 눌러 보자. 참고로 신변과 사연·상담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저도 그랬지만, 노조간부나 활동가들은 너무 힘들어요. 투쟁하는 것도 어려운데 내부 갈등까지 있어요. 마음을 다친 분들은 귀농을 하거나 아예 잠적하기도 합니다. 도피라도 하면 다행이지요. 아예 삶이 망가지는 분들도 있어요.”

하효열(53·사진) 와락치유단장은 “활동가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한 활동은 많은데 정작 그들을 보살피는 사람은 너무 없다”며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 단장의 직함은 여러 개다. 와락치유단장이면서 치유활동가 집단 '공감인'의 대표다. 활동가와 노동자 심리치유 네트워크 ‘통(通)통(統)톡(talk)’ 준비위원회 운영위원장도 맡고 있다. 길목협동조합 심심프로그램에서는 전문상담사로 활동한다.

하 단장은 한때 비행기 조종사였다. 2001년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간부로 파업을 주도했다가 해고됐다. 해고노동자였던 그가 전문적인 상담·치유 활동가로 나서게 된 것은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는 활동가들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이 스스로 이겨 내지 못하면 버려지다시피 하는 현실이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투쟁을 전투라고 한다면 부상병을 치료하는 병원도 의사도 없는 거예요. 잔인하지요.”

하 단장은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2009년 가톨릭대 상담심리대학원 상담과에 진학했다. 학위 과정이 끝나갈 무렵인 2011년 7월 하 단장은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는 희망버스에 올랐다가 뜻밖의 정보를 접했다. 희망버스 투쟁현장에서 구입한 책자를 읽었는데,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치유하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의 얘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하 단장은 무릎을 쳤다. 정 박사에게 전화해 와락에서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렇게 상담·치유 활동가의 첫걸음을 내디뎠고, 2014년부터 와락치유단장을 맡았다. 비슷한 시기에 역시 정혜신 박사가 만든 공감인의 대표가 됐다.

다음달 1일이면 활동가와 노동자 심리치유 네트워크 ‘통(通)통(統)톡(talk)’이 출범한다. 노동자 상담·치유 인프라가 예전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인력·재정 면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하 단장은 노동계의 인식전환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치유보다는 투쟁을 강조하는 데다, 치유활동이 단결투쟁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노동을 둘러싼 상황이) 너무 엄혹하다 보니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길게 봐야죠. 당장 투쟁에 도움이 안 될지는 몰라도 사람을 남겨야 합니다. 무조건 견디라고 하기엔 최근 상황이 너무 힘들잖아요.”

하 단장은 “노동조합 초기에는 서로 마음을 나누고 이해하는 일도 중요한 사업이었다”며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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