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태우 기자

“꿈이요? 티브로드 직원이 되는 겁니다. 그 꿈을 갖고 노조를 시작했죠.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진짜 사장인 티브로드가 설치·수리기사를 직접 고용할 수 없다면 최소한 협력업체가 바뀔 때마다 해고는 안 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영진(42·사진)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장 표정이 굳어졌다. 답답한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지부장을 비롯해 티브로드 협력업체에 고용된 설치·수리기사들이 노조를 만든 것은 2013년 일이다.

노조설립 뒤로 가시밭길이 이어졌다. 매년 노사갈등이 반복됐다. 올해는 전주기술센터에서 23명, 한빛북부센터에서 28명의 해고자가 발생했다. 협력업체가 변경되고 폐업하는 과정에서 신규 협력업체가 고용승계를 거부했다. 조합원이 많은 지역이어서 업체가 부러 고용승계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부는 최근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협력업체가 바뀌더라도 고용을 자동 승계하도록 제도를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기사들이 "진짜 사용자"라고 부르는 티브로드는 꿈쩍도 않았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부 사무실에서 이 지부장을 만났다. 그는 케이블 설치·수리기사 경력 19년차다. 케이블을 절단하는 니퍼를 들고 일하는 기술자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니빠(니퍼) 쟁이"라고 부른다. 태광그룹 유선방송업체 큐릭스를 거쳐 티브로드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지부장은 “우리 회사(티브로드) 욕먹게 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며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들도 애사심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데, 티브로드가 그 책임감의 절반만이라도 따라왔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진짜 사장 갑질에 노동자 독 올랐다”

- 2대 지부장이다. 노조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지부 조합원 중에는 경력 20년 이상 된 분들이 많다. 지역 유선방송이 처음 들어올 때부터 설치업무를 한 분들이다. 유선방송 역사의 산증인들인데, 현실에서는 고용이 불안정한 간접고용 노동자일 뿐이다. 티브로드가 유선방송업체를 인수할 때만 해도 대기업에서 일하게 됐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사들은 설치·수리업무만 하는 게 아니다. 죽을 둥 살 둥 발버둥질해서 설치업무를 끝내고 나면 할당된 신규고객 숫자를 채워야 한다. 땀에 절어 걸레가 된 옷을 걸치고 사무실로 들어와 영업을 했다. 실적을 못 채워 가족이나 지인 명의로 가입시킨 적도 있다. 그런데 티브로드는 기사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인사업자로 전환시켜 버렸다. 문제가 되자 원상태로 돌리긴 했지만 구역을 정해 영업·설치·수리업무를 한꺼번에 시키는 부조리는 계속되고 있다.”

- 노동강도가 경쟁사보다 심했을 것 같다.

“영업 스트레스는 기본이고, 매주 토요일에도 평일 때처럼 출근하고 퇴근했다. 일요일 당직을 하면 한 달에 고작 이틀 쉰다. 휴일 없이 그렇게 일했는데도 월급은 200만원이 안 됐다. 그야말로 노동착취다. 우리도 기술자들인데 이렇게 일해서 2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다는 분노가 여기저기서 끓었다. 협력업체 사장은 '내년에는, 내년에는' 하면서 임금인상을 차일피일 미뤘다. 이렇게 지난 세월이 벌써 4년이다. 노조의 '노'자도 모르고 일만 하던 기사들이 파업을 하고 노숙농성을 하는 것은 노동착취를 당하고 핍박을 받으면서 독이 올랐기 때문이다.”

“극단적 상황 만들 것인가”

- 올해 51명이 해고되면서 고용승계 문제가 불거졌다. 예상 못했나.


“노조설립 전에는 원청에서 가입자 몇 명당 기사 몇 명을 두라는 식으로 센터별 인원을 정하기도 했다. 노조가 생긴 후에는 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센터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28명이 해고된 한빛북부센터는 올해 1월 말 티브로드와 계약이 종료됐다. 인수하겠다는 업체가 없었고, 계약을 갱신하겠다는 말도 없었지만 마지막날인 1월31일에 휴일근무까지 했다. 고용승계가 안 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노조를 설립한 뒤 한빛북부센터 사장이 두 번 바뀌었는데, 매번 재고용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용승계가 되지 않았다. 한빛북부센터와 전주기술센터 모두 조합원이 과반수다. 노조활동이 활발해 센터장들이 '노조가 강성'이라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런 센터 두 곳에서 해고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노조는 신규 협력업체가 나타날 때까지 일당을 받고 일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티브로드가 거부했다. 센터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업체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입찰에서 떨어졌다.”

- 티브로드가 노조탄압을 노리고 새 업체를 선정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원청이 노조를 손보려고 작정한 거라고 생각한다. 조합원이 줄어 노조 힘이 약해졌으니 이때가 기회라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협력업체 사장들에게 업체 변경시 고용승계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해 봤자 소용이 없다. 업체가 바뀌면 그만이다. 원청이 고용승계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씨앤앰은 2014년 12월 109명의 해고자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협력업체와 계약해지시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하고 승계하는 업체와 신규계약을 체결한다. 협력업체가 합의사항을 적용할 수 있도록 씨앤앰이 지휘·감독한다’고 합의했다. 이미 원청이 협력업체 기사들의 고용을 보장한 선례가 마련돼 있다. 최근에는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국민의당·정의당이 티브로드에 고용승계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티브로드가 교섭에 나서야 한다. 지부와 마주 앉는 게 부담스럽다면 희망연대노조와 교섭을 해도 된다.”

- 파업까지 했는데도 원청 입장은 변하지 않은 거 같다.

“티브로드 기사들 참 독한 사람들이다. 그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밤낮없이 일했다. 드라이버·니퍼로 맞으면서 일을 배웠다. 그만큼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우리를 독하게 만든 것은 원청인 티브로드다.

복직투쟁이 장기화하고 있지만 노조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조합원들은 협력업체 변경시 고용승계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내가 해고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누구든 해고될 수 있고,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잘릴 수 있다. 노조 만들면서 '죽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죽으면서까지 투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데 고공농성 같은 극약처방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자꾸 생긴다.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티브로드, 협력업체 고용문제 책임져야”

- 간접고용이 확산하면서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위험의 외주화 우려가 거세다.


“방송통신사업 인허가를 받으려면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통신선로와 장비 같은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허가 조건에서 인력이 빠져 있다. 지부 투쟁은 전국에서 일하는 간접고용 노동자를 대변하는 투쟁이다. 간접고용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리고, 정치권에 알려 법·제도를 바꾸는 투쟁을 하고 있다. 소송을 통해 간접고용 노동자에게 유리한 판례도 쌓아야 한다. 갑도 을도 되지 못한 '병'들이 계속 싸워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겠나.”

- 노동·사회단체와 재벌개혁 투쟁도 하고 잇다.

"노조를 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고민한 적이 있다. 재벌들이 우리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증오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탄압할 리가 없다. 얼마 전 티브로드 전주사업부에 면담을 요구하러 들어가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사업부 직원이 넘어졌는데 진단서를 끊어 고소했다. 조합원과 해고자들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돼 하루에 3명씩 전주지검에 가야 했다. 재벌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구속되지 않고, 구속되더라도 잠깐 형을 살다 나온다. 특사로 사면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재벌이다. 노동자들은 한강 다리에 오르지 않으면 언론에 기사 한 줄 안 나온다. 법과 제도 모두 노동자에게 불리하다.

재벌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티브로드에 직접 고용돼 있지 않지만 티브로드에 대한 애사심을 갖고 일한다. 직접고용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회사 상품을 설치하고 수리하는 노동자들의 고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원청인 티브로드가 짊어져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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