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랑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공공서비스지부 조직부장

만보계가 있어야 가능할 것 같다.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는데도 그 시간을 증명할 길이 없다. 만보계를 차야만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달리고 있는지 겨우 보여줄 수 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육상선수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가스검침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가스검침 노동자들은 간주근로제를 적용받는다. 업무 특성상 일의 시작과 마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할당받은 업무를 기한 내에 소화하는 방식이라 하루 8시간 주 5일을 근무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주 40시간 안에 업무를 다 소화하기는 어렵다. 사실상 주 7일을 꼬박 일한다고 보는 게 맞다. 한 명의 가스검침 노동자가 담당하는 세대는 평균 3천400가구다. 시간을 달리는 수준이 아니라 시간을 날아다녀야 가능하다. 그런데도 시간외수당은 꿈도 꾸지 못한다. 간주근로제로 초과노동이 은폐되고 연봉제라는 임금구조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가스안전점검·검침·고지서 송달은 가스검침원들의 주된 업무다. 그런데 안전점검은 한 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방문한 집에 사람이 없으면 수차례 재방문해야 한다. 늦은 밤·새벽·주말·휴일에 상관없이 대통령보다 더 만나기 힘든 고객들을 쫓아다니려면 10번도 넘게 방문하기도 한다.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 일하는 중간에 간식을 싸 가지고 다니며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으슥한 곳에 가서 앉아서 먹는다. 그럴 땐 비참한 느낌도 든다. 식당에 가서 맘 편히 사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겨우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으로는 차비 빼고 식대까지 빼면 남는 게 없어 그러지 못한다. 서울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젊은 노동자의 가방에는 컵라면이 있었고, 추락사고로 하늘로 간 에어컨 수리기사의 마지막 가방에도 먹지 못한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시간을 달려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밥 먹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스검침원의 또 다른 이름은 ‘도시가스 안전매니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점검하는 가스검침원들은 오히려 안전하지 못하다. 여름철에는 폭염을 견디며 집집마다 다녀야 하고, 겨울에는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한다. 시간에 쫓기며 일하다 보면 넘어지고 접질리는 일이 다반사다. 개별 가정을 방문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성희롱·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곳에 달린 가스계량기를 보기 위해 가스배관을 타거나 담장에 올라가다 떨어지는 일도 종종 있다. 풀더미에 베이고 장미 가시에 찔리고 개한테 물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산업재해 적용은 받지 못한다.

수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은 가스검침원을 귀찮은 ‘불청객’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안전을 담당하는 노동자에게 더 많은 신뢰와 공공성을 부여해야 하는데도 도시가스업체는 노조가 결성되자 위장도급 문제가 불거질까 봐 입고 다니는 작업복에서 서울도시가스 마크를 지우라고 지시했다. 가스검침원들의 일은 다른 검침업무보다 특히 더 많은 사람의 안전과 직결돼 있다. 가스안전 점검이 이뤄지지 않으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전과 연결된 일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양을 주면서 빨리빨리 해야 한다고 하거나, 안전업무에 공적인 권위를 삭감시키려고 한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안전은 어디로 가게 될까. 안전을 담당하는 노동이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도 시민도 모두 안전해진다.

가스검침원 노동자들이 시간을 달리지 않으려면 1인당 맡은 가구수를 줄이고 사람을 더 채용해야 한다. 그러나 서울시·도시가스회사·고객센터로 이어지는 지금의 구조 속에서는 쉽지 않은 현실이다. 서울도시가스·예스코·코원·대륜·귀뚜라미 등 민간기업 5곳은 서울시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고, 검침·점검 업무만 따로 떼어내 고객센터에 위탁을 준다. 이때 서울도시가스 등 공급회사의 고객센터에 지급하는 지급수수료를 책정하는 곳이 서울시다. 그에 따라 도시가스 요금도, 가스검침 노동자의 임금도 결정된다.

도시가스회사와 고객센터는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일을 소화하면서 인건비를 절약하려 하고, 지급수수료 상승을 인건비에 반영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려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지급수수료를 결정한 서울시가 개입해야 하는 대목이다. 서울시는 지급수수료 책정만 하고 내버려 둘 게 아니라 책정비용을 제대로 지출했는지 관리·감독을 해야 한다.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당하고 가스검침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린 이면에 서울시의 책임이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