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며칠 전 은행을 갔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대출 신청 상담을 기다리는 사람이 꽤 많았다. 두 명의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상담 시간이 길어졌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386번 고객님' 소리에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시간이 30분이나 흘렀다. 직원이 준 용지에 이것저것 기재하고 있는데, 옆 직원과 함께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아까, 왜 고객에게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아, 할머님이 대출 과정을 잘 모르셔서 설명을 자세히 하다 보니 늦어졌는데 그 뒤 고객이 '일을 참 못한다'라고 하시더라고." "아, 그래요? 그래도 해 드릴 이야기는 해야…." 두 직원은 서로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공공과 금융에 성과주의를 도입한다고 정부는 밀어붙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말대로 줄 세우기 경쟁이 도입되면 과연 창의성과 생산성이 높아질까. 공공부문에서 필요로 하는 창의성과 생산성은 무엇일까. 잘못된 정부정책과 낙하산 인사와 부실 경영으로 인해 산더미처럼 쌓인 적자를 메우기 위한 성과라면 그것은 앞서 할머니 같은 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정부는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정부와 보수언론은 국민들에게 성과연봉제 도입을 반대하는 노조는 ‘고임금 노동자들’이라는 미끼를 던져 현혹시킨다.

그러나 현명한 국민은 쉽게 미끼를 물지 않는다. 미끼인 ‘임금’을 걷어내고, 문제의 실체인 노동자의 ‘권리’를 꺼내든다.

금융노조가 파업을 했던 23일, 기업은행 남가좌동지점에는 한 고객의 쪽지가 붙었다. "어떤 연유에서 파업에 나서게 됐는지 솔직히 잘 모릅니다. 직원들을 성과에 따라 책정한다는 것에 반대한다,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업은 정당한 권리임에도 직원들을 감금 협박했습니다. 저는 고객의 입장에서 은행이 파업한다면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권리를 위해 조금 참겠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쪽지는 27일 옥수역과 서현역 등 곳곳의 지하철역에도 붙었다.

"철도 같은 공공기관은 성과보다는 공공성과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좀 불편해도 참겠습니다. 노조 파업을 지지합니다."

당신들의 권리를 존중하니, 불편해도 참겠다는 시민들의 관용(톨레랑스)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노동조합에는 큰 힘이자, 책임감이다. 그동안 노조가 외쳐 왔던 ‘돈보다 생명’ ‘이윤보다 안전’ ‘금융 공공성 강화’라는 구호가 결코 밥그릇 지키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기 때문이다.

대출 신청을 마치고 일어서면서 넌지시 앞 직원에게 말했다. "제가 원래 지난주 금요일(23일) 왔어야 했는데, 금융노조가 파업한다고 해서 일부러 오늘 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얼굴과 서류에 적힌 내 직업을 번갈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날 나가지 못했어요. 꼭 갔어야 했는데…. 하루종일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 얘기에 그냥 살짝 웃으며 나왔지만, 내심 이 이야기를 꼭 해 주고 싶었다.

너무 미안해 하지 마시라고. 당신같이 현장에서 고객한테 친절하고 최선을 다하는 노동자들이 있기에 금융노조의 파업이 더 정당한 것 아니겠느냐고.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불편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다음 파업에는 꼭 함께하시라고.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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