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주최측은 20만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양우람 기자
▲ 집회 참가자들은 1부 행사를 마치고 종각-을지로3가-서울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행진에 나섰다. "박근혜를 감옥으로", "새누리도 공범이다"고 외쳤다. 양우람 기자

성난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을 덮었다. 아빠 손을 잡고 온 세 살배기 꼬마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까지 한데 어울렸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투쟁조끼를 걸친 노동자들도 하나가 됐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쳤다.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등 1천50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준)’이 지난 5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집회를 개최했다. 같은날 부산·대구·광주·제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시위가 열렸다. 주최측은 서울 20만명을 포함해 총 30만명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교복부대' 등장에 "너희들이 희망이다"

공식행사 시작 시간은 오후 4시였지만 이른 시간부터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2시간 전 같은 장소에서 고 백남기 농민의 영결식이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고인의 장녀인 백도라지씨는 "언제 치러질 지 모를 장례식이었는데 이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저희 가족과 투쟁본부는 책임자들이 처벌받고 재발방지 대책이 포함된 적절한 사과를 받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몇 시간 후 고인을 실은 운구차량이 고향 전남 보성으로 출발했다. 고인은 광주 북구 망월동 5·18 구묘역에 안장됐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큰 글씨로 ‘구속영장’이라고 쓰인 손피켓을 들고 있었다. 피고인은 ‘박근혜’, 죄목은 ‘전국민 멘붕 유발죄’였다. 다섯 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서정석(38)씨는 “원래 시위 같은 것과는 담쌓고 살아온 사람인데 보이지 않는 손에 국민들이 놀아났다는 생각에 너무 화가 나 여기에 왔다”며 “자식들에게 이런 나라를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집회는 정명선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의 여는 말로 시작됐다. 정 운영위원장은 “미래의 주인인 아이들을 단 한명도 구해 내지 못하고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다”며 “국민의 손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자”고 외쳤다.

행사가 진행되던 중 무대 왼편 세종문화회관쪽에서 큰 함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중고생혁명지도부’가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세워 내자”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집회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본 한 시민이 “너희들이 희망이다”고 외치기도 했다.

실제 이날 집회는 수백명의 ‘교복부대’가 참여했다. 학생들은 “저희가 배운 민주주의는 어디 갔습니까” “죽어가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살리겠습니다”고 쓰인 피켓을 들고 있었다. 한 학생은 확성기를 들고 “혁명 순간마다 학생들이 나섰다”며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쳤다.

전교조 조합원인 최창식 교사는 무대에 올라 학생들 사이에서 떠돈다는 ‘순실고 시간표’를 소개했다. 박근혜 정부를 풍자한 시간표는 △1교시 국어, 연설문 고쳐 쓰기 △4교시 한국사, 국정교과서 만들기 △6교시 생명과학, 아빠 유전자 물려받기 △7교시 체육, 삽질하기…. 최 교사의 말을 듣고 있던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폭소를 터뜨렸다.

박근혜퇴진 기독교운동본부의 김경호 목사는 “박근혜 대통령은 사드배치와 개성공단 폐쇄로 국정을 농단하고, 고 백남기 농민으로 대표되는 국민을 폭력으로 짓밟았다”며 “하늘의 명령으로 퇴진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문화 공연도 이어졌다. 래퍼 ‘제리케이’가 무대에 올라 신곡 ‘하야해’를 불렀다.

"사이비교주와 교주의 딸 이게 최씬지 박씬지 난 잘 모르겠다. 이젠. 여왕마마답게 우아하게 사라질 방법 하나 남아 있네. 하야해"라는 가사였다.

도심 메운 '촛불행렬'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2시간여가 흐르고 1부 행사가 마무리됐다. 사람들은 손에 든 촛불을 켰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거리행진에 나섰다. 행진은 세종대로사거리에서 광화문우체국 방향으로 진행됐다.

경찰은 애초 주최측에 집회 하루 전 행진 금지를 통고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이 행진금지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통고는 뒤집혔다.

참가자들은 길을 걸으며 “박근혜를 감옥으로” “너희들은 고립됐다” “이제는 항복하라” “새누리도 공범이다” 같은 구호를 외쳤다. 주말 저녁을 즐기던 시민들은 보기 드문 광경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휴대폰을 들고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군중을 카메라에 담았다.

인도에 있던 사람들도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쳤다. 박아무개씨(24)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알고 보니 꼭두각시였다니 소설이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 황당한 일”이라며 “자신이 외치던 ‘국격’을 위해서라도 대통령은 스스로 물러냐야 한다”고 말했다.

길을 잘못 들어 유턴하는 차량들도 있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구호에 맞춰 자동차 경적이 울려 퍼졌다. 행진은 종각-을지로3가-서울광장을 거쳐 출발 지점인 광화문광장에서 끝이 났다. 2시간여가 소요됐다. 최초 5만명이었던 시위대는 거리행진이 진행되면서 20만명으로 늘어 있었다.

20만명은 예고편? 본편은 12일 민중총궐기

다시 광화문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빈 공간에 촛불을 모아 “하야”라는 큰 글씨를 만들기도 했다. 2부 문화제에선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깜짝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의 말은 날이 섰다.

"집에서 조용히 글을 쓰다가 국민 여러분의 함성이 들려서 왔다. 낡아 빠진 삶을 지속시키려는 사악한 무리들이 보이지 않는 곳곳에 꽉 차 있다. 진정으로 해방을 맞이할 그날을 향해 여러분은 전진하고 있다.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한다."

무기한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김영훈 철도노조 위원장은 정부가 기업들을 위해 성과연봉제를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대통령은 어제(4일) 기업들이 아무 대가 없이 선의로 돈을 줬다고 했다"며 "과거 느닷없이 20조원에 달하는 민자철도 계획을 발표했는데, 재벌들에게 민영화와 성과퇴출제보다 좋은 대가가 어디에 있냐"고 꼬집어 말했다.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쌀값 폭락으로 농민을 고통에 빠뜨리고, 사드 배치로 한반도를 불안에 빠뜨린 대통령이 국가 안보와 경제를 말할 자격이 있느냐”며 “향후 집회에 3만명의 농민을 서울로 동원하고, 농민은 모든 농기계를 앞세워 퇴진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송경동 시인도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을 암흑으로 내몰 노동개악에 나설 때부터 박근혜는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었다”며 “저희 문화예술인들은 시민 여러분과 함께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그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강조했다.

공식행사는 9시께 마무리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집회 과정에서 경찰과 큰 충돌은 없었다. 주최측은 오는 12일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민중총궐기 대회에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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