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아직 성에 안 찹니다."

단병호(68·사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이사장의 말이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은평구 불광동 민주노총 서울본부 3층에 위치한 평등사회노동교육원에서 만난 단병호 이사장은 교육원 '기세'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실 단 이사장에게 궁금했던 건 최근 격동하는 정세와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 대응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였다. 한국 노동운동의 산증인이자,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패 책임을 통감하며 진보정당과 정치권을 떠난 그에게 묻고 싶었다. "요즘 민주노총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단병호 이사장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인터뷰 시작 전부터 "대선 정국이나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몇 차례 유도질문은 불발탄이 됐다. 교육원 얘기부터 물었다.

"알까기, 세포분열은 잘되고 있습니까?" 단 이사장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세포분열 세 번, 강사단 120명 전국 포진"

"새로운 노동자 교육기관"을 표방한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이 설립된 지 어느덧 6년이 흘렀다. 침체에 빠진 노동운동을 일으켜 세우려면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활동가들이 필요했다. 활동가들을 키워 내는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이 절실했다. 그런 절박함에 단 이사장은 2011년 교육원을 창립했다. 지난해 12월까지 1천400명에 가까운 수강생을 배출했다.

교육은 활동가 기초·중급과정과 리더십과정으로 나뉜다. 모든 과정이 토론 방식으로 이뤄진다. 교육을 받은 노동자가 현장에서 다른 이들과 교육을 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다시 '강사훈련'을 받게 했다. 단 이사장은 이를 "알까기, 세포분열 식 교육"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교육원은 6년간 알까기 또는 세포분열을 세 번 했다. 창립 직후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한 활동가·노동자 일부가 1대 강사로 자리 잡았다. 이들이 다시 현장에 내려가 학습모임을 꾸리고 교육을 해서 2대 강사를 양성했다. 2대 강사들에게 배움을 받은 노동자들이 다시 3대 강사가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강사가 전국에 120여명이 포진해 있다.

단 이사장은 "지금까지 세포분열을 세 번 하면서 3대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직 성에 안 찬다"고 했다. 그는 "4대와 5대까지 강사들이 나와야 노동의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현장활동가들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겠냐"며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하다"고 말했다.

현장·사업장 맞춤식 교재 개발

교육원은 현장이나 사업장별로 교육프로그램과 교재를 개발해 준다. 금속노조의 경우 2015년 말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금속노조사(史)를 포함한 '금속노조 간부 기본과정 교재'를 개발했다. 현대중공업노조(현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에도 '현중노조사'와 '사내하청 비정규직' 내용을 담은 '현대중공업노조 기본과정 교재'를 6개월에 걸쳐 만들었다.

단 이사장은 "현대중공업노조는 현장 활동가들을 재구축해야겠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며 "1~2년 전부터 교육원 기초과정을 6~7개팀으로 나눠 들은 뒤 자기 사업장 특성을 고려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고 밝혔다.

올해로 7년차를 맞은 교육원의 첫 번째 목표는 회원 확보를 통한 재정 안정화다. 보통 학원들이 비싼 수강료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교육원은 개인이나 단체 회원들이 한 달에 1만원 이상 내는 회비로 살림을 꾸려 나간다. 수강료는 기초과정 12강(3개월)에 10만원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대폭 할인해 3만원만 받는다. 비용을 안 받으면 되레 교육의지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금액을 내고 다니게 하자는 취지다. 수강료는 6년간 올리지 않았다.

"최소 경비를 받되 기본 운영은 해야죠. 교육원 취지와 프로그램에 동의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회원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올해 목표는 회원 200여명을 추가로 확보하는 거예요."
 

▲ 정기훈 기자


"노동자 정치세력화, 한 호흡 가다듬고 새로 시작해야"

50여분이 지난 후 촛불집회 얘기로 슬쩍 넘어갔다. "유도질문을 하는 것이냐"는 '저항'이 있었지만, 그는 이내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 촛불집회는 많이 나가 보셨나.

"출석률이 한 80%는 되는 것 같다."


- 촛불집회에 나가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첫 집회 때에는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다. 두 번째 집회에 갔을 때 느꼈다. '아, 민심의 동요가 상당하구나, 정국이 소용돌이 치겠구나'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역동적이었다. 여러 가지 평가가 있겠지만 지난해 11월12일 민중총궐기가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촛불집회 인원이 10만명, 20만명 늘어났을 때만 해도 검찰이나 정치권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는데, 그날 민중총궐기를 마치고 광화문에 자그마치 100만명이 모였다. 이후 야당이나 검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주노총이 큰일을 했다."


- 촛불집회에서 큰 역할을 한 민주노총인데, 현재 조기 대선 국면에서는 역할이 잘 안 보인다. 대선방침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것 같은데.

"일을 할 때 '됐으면 하는 것'과 '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현재 정치적 상황이나 엄중한 상황에 비춰 보면 노동자들이 정치 주역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게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안타깝지만 지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그 답을 던졌다고 본다. 돼야 하는 게 안 된 거지 않나. 2008년 민주노동당이 분당됐다. 진보신당도 만들었다가 통합도 했다가 갈라섰다가 결국 통합진보당 해산까지 왔다. 2008년 분당 과오를 딛고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지금 시기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2008년 이후 과정은 '2008년도'를 더 생채기 내고 더 아프게 하는 과정이었다. 노동계 갈등이 심화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회의가 오히려 커진 시간이었다. 지금 상황과 정세에서 당연히 돼야 하는 것들이 안 되는 걸 보면 아쉽지만 현재 상황은 상황대로 냉정하게 봐야 한다.

지금은 차기 정권이 들어섰을 때 노동계가 어떻게 대응할지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한 호흡 가다듬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냉철하게 상황을 보자는 얘기다."
 

- 차기 정권이 들어섰을 때의 노동계 대응이란 어떤 것인가.

"신자유주의 이익구조 속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노동의 가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노동을 국정의 중심 가치로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대응해 노동이 어떤 준비태세를 갖출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자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수감 중이었다. 한 노동계 인사가 접견을 와서 '노무현 정권에서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이렇게 얘기했다. '인간 노무현은 정말 좋아하고 신뢰한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은 신뢰하지 않는다'고.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대통령 노무현은 인간 노무현과 다른 고민과 다른 판단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선 주자들이 지금은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액면 그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집권하면 그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준비하는 게 지금 민주노총이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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