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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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빨간 (이륜)차를 만들라고 하면 빨간 차를 만들었고, 파란 차를 만들라고 하면 파란 차를 만들었다. 지시받은 대로 열심히 오토바이를 만든 죄밖에 없다. 왜 경영악화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나?"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들 표정은 심각했다. 노동자들은 "오세영 성공신화 자랑 말고 기술먹튀 중단하고 생존권 보장하라"거나 "고용불안 노사관계 오세영 자본은 각성하라"고 쓴 피켓을 들고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경남 창원의 대표 향토기업인 KR모터스가 대규모 정리해고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24일 창원에서 서울로 올라온 KR모터스 창원공장 노동자들은 여의도 CCMM빌딩에 입주해 있는 코라오홀딩스 서울사업소 앞에서 집회를 열고 "매각 반대 ·기술먹튀 반대·강제적 정리해고 분쇄"를 외쳤다. 이날 집회에는 100여명이 참석했다. 김만재 금속노련 위원장과 연맹 산하조직 간부들도 함께했다.

KR모터스는 국내 판매량 감소를 이유로 지난해 12월2일부터 3개월간 임시휴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휴업에 들어가기 한 달 전 회사가 한 부동산업체 사이트에 공장부지 매각글을 올린 사실이 드러났다. 노조가 반발하자 성상용 KR모터스 대표이사는 지난달 18일 노사협의회에서 공장부지 매각을 철회하는 대신 "생산직 60~70%를 구조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KR모터스 직원은 170여명이고, 이 중 생산직은 110명이다.<본지 1월24일자 8면 '매각설·기술먹튀설 휩싸인 KR모터스 생산직 60~70% 구조조정' 기사 참조>

최근 노사협의회에서도 회사 입장에 변화가 없자 노조는 이날 상경집회를 했다. 회사는 하루 전인 23일 창원공장을 재가동하면서 "상경집회를 할 경우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의 대표이사 담화문을 사내 게시판에 붙였다. 상경한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그깟 협박이 대수냐"고 반발했다. 김만재 위원장은 "우리 생존권은 누가 지켜 주지 않는다"며 "목숨 걸고 싸우자.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장밋빛 미래 강조하더니 3년 만에 구조조정?

KR모터스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700시시(CC) 대형 모터사이클 생산기술을 갖춘 업체다. 1978년 효성기계공업으로 출발해 2003년 효성그룹에서 분리된 이후 한솜모터스·S&T모터스를 거쳐 2014년 3월 라오스 한상기업인 코라오홀딩스에 인수됐다. 직원들은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던 S&T모터스가 코라오홀딩스에 인수될 당시 "장밋빛 희망에 부풀었다"고 회고했다.

오세영 코라오홀딩스 회장은 이른바 '라오스의 정주영'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라오스에서 성공신화를 일군 인물이다. S&T모터스 인수 한 달 전인 2014년 2월 창원공장 전체 직원을 라오스로 초청한 오 회장은 "5년 내 매출 1조원을 달성하고 해외 판매네트워크를 50개국으로 확대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5년간 전 직원 고용안정도 약속했다.

94년에 입사해 수차례 회사 주인이 바뀌는 걸 봤다는 김호영(50·가명)씨는 "라오스에서 오세영 회장이 회사 견학을 시켜 주며 꿈과 비전을 보여 줬을 때 '야, 이번에는 진짜 다르겠구나' 하고 기대에 부풀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5년간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열심히 일했는데, 불과 3년 만에 직원 70%를 내보내겠다고 하니까 기가 찰 뿐"이라고 토로했다. 대학생 자녀와 고등학생 자녀를 둔 그는 "여기 온 사람들은 세계적인 이륜차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20~30년간 일한 노동자들"이라며 "평균 나이 오십이 넘고 한창 클 애들을 둔 가장더러 하루아침에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 첫 직장으로 입사했다는 양지운(48·가명)씨는 "그동안 회사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직원들은 임금삭감으로 고통을 나눠 왔다"며 "아무리 어려워도 지금처럼 직원들을 무작위로 70%를 내보내겠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백차근 KR모터스노조 위원장은 집회에서 "코라오 오세영 자본은 인수 당시 5년 내 매출 1조원 달성과 5년간 전 직원 고용보장을 약속했고 세계 시장경쟁에 맞는 연구개발을 마친다고 했다"며 "코라오 자본은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백 위원장은 "무능하고 부도덕하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경영진은 더 이상 교섭 대상이 아니다"며 "오세영 회장이 교섭장에 나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 "이러다 일자리 없어져" vs 노조 "경영진 잘못은?"

KR모터스는 국내 이륜차 시장 불황이 계속되는 만큼 생산직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는 "오토바이 산업 자체가 하향세라서 협력업체들까지 어려운 상황이고, 기술개발에도 한계가 있다"며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길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밝혔다.

KR모터스는 지난해 8월 중국 1위 오토바이 생산그룹인 제남칭치오토바이유한공사와 합자법인인 칭치대한오토바이유한공사를 설립했다. 현재 중국 산둥성 지난시 하이테크기술개발구에 오토바이 생산공장과 연구개발(R&D) 센터를 짓고 있다. 올해 11월부터 공장을 가동한다. 회사는 창원공장 생산직 60~70%를 줄인 후 국내에서는 기관에 납품하는 이륜차와 전기스쿠터만 생산하겠다는 방침이다.

회사 관계자는 "매출이 5배, 10배 이상 커지지 않는 이상 현재 생산직 인원을 다 안고 가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회사는 열린 자세로 노조와 협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회사가 어려워져 모두 일자리를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고도 했다.

이에 대해 백차근 위원장은 "분명히 말하지만 국내 판매량 부진은 오토바이 시장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경영진 잘못이지 노동자들의 잘못이 아니다"며 "회사가 일방적으로 기술먹튀와 공장매각, 정리해고를 강행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집회에 앞서 이날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대수 한국노총 부위원장은 "KR모터스 노동자들은 회사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저임금과 임금동결, 법인분리, 휴업을 묵묵히 받아들였다"며 "회사는 지역경제를 붕괴시키고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무책임한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기업은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며 "인수 당시 고용을 보장하고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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