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정치세력화 문제가 장기간 난항을 겪고 있다.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민주노동당이 결성되고, 의회에 10여석을 차지하고 할 때까지만 해도 이대로만 나가면 정치세력화가 잘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20석 이상을 차지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획득하고, 그 다음에는 제1 야당이 되고, 그 다음에는 집권당이 되고 할 줄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장밋빛 기대나 전망은 결과적으로 실현되지 못했고, 얼마 전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보듯 이제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통일된 정당을 만드는 일조차 난망한 상태에 처했다.

누군가는 멘붕에 빠졌다고 하고,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원망한다고 한다.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단일안으로 올라온 정치방침이 대의원대회에서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됐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 중집 안은 지난해 8월 사상 초유로 열린 정책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의 통합진보정당 건설방침이 부결된 이후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정치특위와 여러 단위에서 많은 고민과 논의를 거쳐 성안되고 제출된 것이었다고 하니 더욱 그럴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문제를 근원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많은 세월과 노력을 소모했는데, 또다시 그런 소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터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하면 곧바로 정당 건설로 등치하는 사고방식은 과연 타당한가. 정당 없이 정치세력화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치세력화는 곧 정당 건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너무 단순하고 도식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건설될 정당의 기반은 무엇인가. 바로 노동조합이다. 그러면 정당의 기반이 될 노동조합은 어떠한 노동조합이어야 하는가. 어용적인 노동조합이 기반이 된다면 그 정당은 자본에 어용적인 정당이 될 것이다. 진보적인 노동조합이 기반이 된다면 그 정당은 진보적인 정당이 될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탈정치화돼 있다면 그런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정당은 유력한 정당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조합원들이 정치화돼 있지만 지지하는 정당에 당비를 내고 투표하는 수준에서만 정치에 참여하는 조합원이라면 그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은 의회정치는 할 수 있어도 광장정치는 힘 있게 펼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정당을 만들 것인지 먼저 따져야 하고 그것을 위해 어떤 노동조합을 만들 것인지 짚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자고 하면서 이런 논의는 별로 활발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역사적 위기에 처해 있는 현 정세에서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정당은 단순한 진보정당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진보정당, 변혁과 혁명을 추진하는 진보정당이다. 노동계급의 정당이 변혁과 혁명을 추진한다면 그 정당은 사회주의 이념과 가치지향을 분명히 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소소한 개량만을 추구할 바에야 자유주의 정당에 들어가 한 계파를 구성하는 편이 더 효과적인 정치세력화의 길로 보일 수도 있다.

지금 전직 민주노총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문재인 캠프에 몰려가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넘어 그동안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개량주의 지향성을 엄격하게 자기비판해야 할 것이다.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정당이 개량과 개혁을 넘어 변혁과 혁명을 추구하려면 그것의 기반이 되는 노동조합 역시 변혁과 혁명을 추구하는 노동조합이어야 한다. 그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정치적으로 적극적이고 행동적이어야 한다. 선거 캠페인만이 아니라 촛불집회에도 자기 노동조합의 깃발을 들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조합원이어야 한다. 자본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파업을 과감하게 수행하는 조합원이어야 한다.

요컨대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정당은 노조간부나 정파 구성원들이 조합원들을 대리해 진성당원이 되는 대리자들의 정당이 아니라 일반 노동자 대중이 주인·주체가 되는 정당이어야 한다. 이런 노동자 대중 정당의 기반이 되는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후원금 내고 세액공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정치투쟁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안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조합원이어야 한다.

이런 조합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을 경제주의 노동조합과 대비해 정치주의 노동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현재의 민주노조들은 실은 정치를 경제적 목적 달성을 위한 하위수단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경제주의’ 노동조합일 뿐이다.

대중적·혁명적 진보정당을 통해 세상을 변혁하려면 국가의 정치체제도 바꿔야만 한다. 헌법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만 돼 있고, 국민에게서 나온 다음에는 국민 통제에서 벗어나는 간접민주주의 정치체제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민의가 배반될 수밖에 없다. 이런 간접민주주의만을 강요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직접민주주의가 중심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정치제제로 바꿔 나가야 한다. 노동계급 정당은 단순히 현존 국가권력을 차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존 국가권력의 소외된 성격을 해체하고 민중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는 과제도 필히 받아안아야 한다.

민주노동당 때부터 우리는 이런 대원칙을 중시하지 않았고, 역으로 대리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대리주의 정당을 통해 대리주의 정치만을 추구했다. 그런 틀 안에서 불가피하게 패권과 분파이익 추구만 두드러졌다. 이런 문제는 정파 지도부와 노동조합 관료들의 도덕성 문제인 동시에 그동안 추진·추구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천적 오류의 문제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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