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주년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조기퇴근시위 3시STOP’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유리천장을 상징하는 비닐우산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기훈 기자

“하는 일도 똑같은데 남성이 여성보다 임금을 더 받는 게 합리적인가요?”

게임 회사에서 근무하는 여성 개발자 서하나씨가 이 같은 질문을 던지자 부부젤라 소리가 광장을 뒤덮었다. 서씨는 “남성이 여성보다 돈을 더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비용이 많으니,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씨의 말에 빨간 곱슬머리 가발을 쓴 남성들과 빨간 가면을 쓴 여성들이 손뼉을 쳤다. 이날 광장을 찾은 이들의 드레스 코드는 빨강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경고메시지를 던진다는 의미다.

민주노총과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노동·여성단체는 8일 오후 109주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조기퇴근시위 3시STOP’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성별 임금 격차에 항의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조기퇴근시위 3시STOP 공동기획단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36%를 넘는다. 남자가 100원을 받을 때 여자는 64원 받는다는 얘기다. 참가 단체는 8시간 근로로 환산하면 여성이 오후 3시부터 무급으로 일하는 셈이라고 풀이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격차가 가장 심하다. 무임금이 되는 오후 3시부터 일을 멈추자는 차원에서 이날 행사는 오후 3시부터 시작됐다. 프라이팬에 ‘STOP’이라는 문구를 적은 참가자도 눈에 띄었다. 참가자들은 ‘유리천장 OUT’이라고 적힌 투명우산을 흔들거나 빨간색 부부젤라를 불며 여성 차별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열심히 일해야 살아남는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김선희(가명)씨가 근무하는 회사는 건설 엔지니어링 업계 10위 안에 드는 중견 건설업체다. 회사 동료들은 김씨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홍일점’이라고 불렀다. 이 회사 여성 직원 비율은 5% 정도로 성비 불균형이 극심한 회사다. 이렇다 보니 회사는 자연스럽게 남성 직원 위주로 돌아갔다.

여성 임원은 한 명도 없다. 여성을 위한 복지제도는 없다시피하다. 기술직을 제외한 직군에서 성별 임금격차도 극심했다. 회계·관리·행정직군에 근무하는 여성 직원들은 호봉이 남성 직원과 비슷해도 임금은 60% 정도밖에 못 받았다. 육아휴직을 다녀온 뒤 복귀하면 이전 부서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부서로 옮겨졌다.

김씨는 “신입사원들을 보면 항상 여성들이 스펙이 훨씬 뛰어났다. 남성보다 월등해야 여성들은 입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직원은 늦게까지 일을 시킬 수 없고 체력이 약할 것 같아 회사가 선호하지 않는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김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도 어렵고 남성들보다 열심히 일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아이 아팠지만 출근해야 했다"

여성들만 일하는 사업장에서도 복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10년차 간호사 이수지(가명)씨와 장희원(가명)씨 얘기가 그렇다. 이씨는 두 자녀의 엄마고, 장씨는 현재 미혼이다. 최근 두 살이 된 둘째 아이가 아팠는데 이씨는 병원에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병원은 꽉 짜인 교대제근무 사업장이라 이씨가 갑자기 빠지면 동료들 업무 강도가 높아진다. 결국 이씨는 둘째 아이를 퇴근한 뒤 다른 병원 응급실에 데려가야 했다. 이씨는 “인력이 조금만 많았어도 연차를 쓸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동료한테 피해를 끼치기 때문에 상상도 못한다”고 말했다.

장씨는 교대제근무로 소화불량·불면증을 지병처럼 달고 산다. 간호사가 된 뒤에는 생리불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운동도 하고 약도 먹어 봤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장씨는 “갑자기 생리가 시작되면 진통제를 먹고 참으면서 일한다”며 “보건휴가 제도가 있지만 수당만 받았고 실제 쓴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노조가 있어서 여성들의 근무환경은 느리게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일하면서 애 낳아서 기억력이 나빠졌냐' '술은 여자가 따라야지' 같은 얘기를 듣는다”고 설명했다.

“3시부터 무임금, 임금격차 해소하라”

참가자들은 성별 임금격차를 해소하고 평등한 임금을 지급하라고 촉구했다.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최저임금 1만원 △임금하락 없는 주 35시간제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 △직장내 성희롱 기업주 책임 강화를 포함해 10개 의제를 제도화하라고 요구했다.

3시STOP 공동기획단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박탈당하고 싸구려 노동력 취급을 받는다”며 “여성이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고 차별과 착취가 상식인 나라를 원한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여성이 떼어먹힌 임금과 빼앗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행사를 마친 노동자·시민들은 광화문광장에서 고용노동부 서울지방고용노동청까지 행진하고 다시 광화문광장으로 돌아온 뒤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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