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에서 모든 위험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노동자가 조립라인이나 갱로에 들어설 때, 국가가 안전을 위해 그들과 함께 서 있음을 보장할 수 있다. (중략) 모든 미국 국민에게 안전하지 않은 작업조건 때문에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의식과 활동에 참여하기를 촉구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3년 4월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앞두고 발표한 선언문이다. 2001년부터 2015년까지 15년간 한국에서 산업재해 사고를 당한 노동자는 126만3천293명이다. 산재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3만5천968명이나 된다. 해마다 평균 2천400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숨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를 가지고 있을까.

19대 대선후보들이 안전공약을 내놨다. 지금껏 산업안전보건에 대해 이처럼 다양한 후보가 공약을 낸 것은 처음이다.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인식과 실천방안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산재사망자 95%가 하청 노동자=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구의역 사고 등을 겪으며 ‘안전’이 우리 사회 화두로 떠올랐다. 고질적인 안전불감증과 안전시스템 부재가 도마에 올랐다. 국민안전처가 출범했고 안전 관련 예산도 2조원이나 추가 투입됐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재사망률 1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23일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하청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원청 노동자보다 8배나 높다. 주요 업종별 30대 기업에서 발생한 산재사망 노동자의 95%가 하청 노동자다. 산재의 80% 이상이 중소·영세 사업장에서 발생한다.

양대 노총과 안전보건단체들이 전년에 가장 많은 산재 사망자를 낸 기업을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해 매년 발표한다. 지난해에는 한화케미칼을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했다.

2015년 폐수 집수조 보수공사 중 폭발사고로 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모두 하청 노동자였다. 그해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된 현대중공업에서 숨진 노동자 8명 역시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원청이 유해·위험업무를 하청·재하청 형태로 넘기면서 하청 노동자들이 산재에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가 위험의 외주화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공단에 따르면 원청업체 10곳 중 4곳이 하도급을 주는 이유로 “유해·위험 업무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강문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은 지난 13일 열린 ‘2017 대선 캠프 초청 국민 생명안전 대토론회’에서 “대기업은 위험의 외주화로 산재예방·보상·처벌의 책임에서 빠져나가고, 수백억원의 산재보험료를 감면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산재 책임은 노동자 몫?=산재사고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매년 2천400명이 산재로 사망하고 있지만 기업이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업의 안전조치 미흡으로 사고가 발생해도 그 책임은 개인에게 돌아간다. 설사 기업이 처벌을 받더라도 벌금형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3년 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여수산업단지 폭발사고의 경우 기소된 사람 중 가장 높은 직책은 여수공장 공장장이었다. 그가 징역 8개월을 선고받은 대신 사고를 책임져야 할 대림산업은 벌금 3천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아르곤 가스누출로 5명이 숨진 현대제철 당진공장은 어떨까. 기소된 사람 중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은 생산본부장이었다. 그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현대제철은 벌금 5천만원에 그쳤다.

하청 노동자 산재사망에 대한 원청 처벌은 대부분 무혐의로 결론 난다. 지난해 메탄올 중독 실명 사고 피해자는 삼성과 LG의 3차 하청업체 소속 불법파견 노동자였다. 광주 남영전구 수은중독은 4차에 걸친 다단계 하청에서 일어났다. 원청인 대기업은 위험한 업무를 외주화해 산재예방과 보상, 처벌에서 손쉽게 빠져나간다.

◇대선후보들, 산업안전보건 공약 내놔=19대 대선후보들은 이달 1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위한 대국민 약속식’에 참석해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산업안전보건 공약도 내놨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생명안전에 대한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에 있다”며 “시민과 노동자의 권리보장이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길”이라고 밝혔다. 문 후보는 통합적 재난안전관리체계 구축과 국가 재난 트라우마 총괄 지원체계 구축 등 안전공약을 제시했다. 그는 산업현장 중대사고에 대해 사업주 책임을 강화하고 중대사고 발생시 기업과 공공기관의 책임을 과실치사로 묻는 내용의 법 제정을 공약했다. 중대사고를 일으킨 기업을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안전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더 중요해져야 한다”며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고 밝혔다. 안 후보는 국민안전시스템 구축과 시민참여 거버넌스 강화·중대재해기업처벌 등 책임제도 강화를 약속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삼성반도체에서 쓰러진 노동자들, 가습기 살균제로 돌아가신 아이들의 엄마·아빠, 세월호와 함께 스러져 간 아이들, 매년 2천명 이상씩 죽어 가는 산재노동자를 가슴 깊이 새기겠다”며 “생명을 이윤보다 더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는 대한민국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심 후보는 위험업무 외주화 금지와 하청업체 산재에 대한 원청·발주처의 책임 강화, 산업안전보건법을 직업안전보건법으로 전면 개편,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전면 개정, 산재보험 적용대상 확대와 사회보험 기능 강화를 공약했다.

김선동 민중연합당 후보는 “사람보다 돈을 앞세우지 않고 돈보다 사람이 소중한, 생명이 이윤보다 소중한, 안전이 효율보다 우선시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위험의 외주화 금지와 원청 책임 강화, 안전규제 완화 중단,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약속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10대 공약을 통해 원청 사업주에게 해당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수급업체 근로자의 작업안전과 사고에 대한 책임을 부과하고 작업중지명령 강화 등 처벌수준을 높여 산재사고를 예방하겠다고 밝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파견근로자 권리보호를 위한 근로자 참여제도 혁신을 약속했다.

◇ “공약 의미 있지만 내실 부족”=대선후보들이 이 같은 공약을 내놓은 이유는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메탄올 중독과 구의역 사고 등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안전사고와 관련해 국민적 요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강태선 아주대 교수(환경안전공학)는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한 토론회에서 산업안전보건 관련 질의에 ‘다 하겠다’는 식으로 답했는데, 그걸 공약이라고 할 순 없다”며 “19대 대선후보들이 산업안전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안전 문제를 공약으로 제시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대선후보 공약이 시민재해에 치중한 데다, 산업안전보건과 관련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실장은 “대선후보들의 공약은 주로 생명안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산재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관련 공약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조 실장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도 원·하청 문제에서 산재로 접근하지 않고 젊은 청년의 죽음에 초점을 맞췄다”며 “실질적인 산재를 줄이고 안전하고 건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산업안전에 대한 인식전환과 함께 국가지도자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은 “박근혜 정권하에서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 등 한국 사회 전체를 요동치게 만든 안전사고가 발생했다”며 “사건의 중대성과 비교해 제대로 된 생명안전 공약을 내놓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최 국장은 “여전히 많은 후보가 컨트롤타워 부재와 같은 정치공방에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계는 대선후보들에게 안전한 일터를 위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위험의 외주화 금지와 하청산재 원청 책임 강화 △모든 노동자의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모든 노동자의 산재보험 전면 적용 및 인정기준 확대 △생명안전업무 외주화 중단과 시민안전 직결 업무 인력 확충 △대중교통과 산업단지 노후화 공공안전 대책 수립 △안전보건 전문가 선임 확대 등 생명안전 일자리 창출 같은 세부공약과 실천을 요구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