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공식 공인노무사(이팝노동법률사무소)

아내는 출산예정일 한 달 전부터 출산휴가를 사용하고 이후에는 육아휴직으로 전환했지만 휴직 대체자를 구하기 어렵다면서 회사 생각을 하더니 출산휴가·육아휴직을 묶어 1년으로 ‘에누리’했다. 아내의 복귀가 다가오면서 동시에 우리의 고민도 밤마다 이어졌다.

먼저 (남편)육아휴직을 하던 친구를 보면서 가진 용기로 어느 밤 아이 빨래를 개면서 불쑥 아내에게 말했다. “고민해 봤는데 아빠랑 함께하는 시간이 아기에게도 나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아.” 소설 구절처럼 육아와 가사노동을 추억 쌓기로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남편이 못 미더웠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육아와 가사노동 도우미에서 주체자로 아내의 후임자가 됐다. 아내가 복귀하기 두 달 전 어렵사리 동네 어린이집의 등록순번도 결정이 돼서 어린이집을 보낸 시간에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란 원대한 계획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오만하고 짧은 생각이었다.

청소·빨래·설거지는 내가 원래 잘하던 것이고 육아는 힘들겠지만 웃으면서 해 보자고 한 나의 다짐은 단 이틀 만에 어깃장이 났다. 아내의 직장복귀 이틀째 아이는 갑작스런 고열이 나고 신종플루(A형 독감) 확진으로 밤과 낮의 구분 없이 몽롱한 시간이 일주일간 이어지면서 웃음과 추억이란 단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퇴근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나는 일이 많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밤늦게 왔던 기억을 잊어먹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고 밥을 주는 역할을 겨우겨우 해 나갔다. 아내가 육아휴직을 하던 중에 “왜 아이 먹을 이유식은 그렇게 정성스럽게 하면서 남편에게는 밥 먹으라는 말이 없냐”며 막말을 한 것을 깊이깊이 반성하면서 말이다.

아이가 건강을 회복하면서 나도 가사노동과 육아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 하루가 네 마디의 대나무처럼 나뉘어졌다. 아이가 아침에 눈을 떠서 어린이집 가기 전까지의 한 마디, 어린이집에서 있을 때 나에게 주어진 6시간 동안의 두 마디(어린이집에는 오전 10시에 가서 오후 4시쯤 데려온다),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세 마디, 아이가 잠든 이후가 네 마디다. 그 두 마디째 시간에(오전 10시~오후 4시) 내 일을 하면서 육아·가사와 일을 병행하는 참된 아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봤었다.

하지만 육아와 가사는 반복의 반복임을 몸이 먼저 알았다. 두 마디째 시간에도 정신없이 밀린 집안일을 하면서 동시에 나의 일을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러면서 나의 인식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도 알았다. 육아를 포함한 가사노동의 가치를 평소에는 짐짓 안다는 듯 아내에게 말하고 청소나 빨래를 하면서 생색을 내던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한 가치를 달리 보게 됐다. 하늘과 땅만큼 말이다.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 동네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두 손 가득 아이 가방과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마침 퇴근하는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과 마주쳤다. 선생님은 요즘 이런 아빠가 없다며 애기는 아빠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서 참 행복할 것이라고 하셨다. 친구 같은 아빠가 될 것이라는 덕담도 함께 들었다. 칭찬과 덕담에 감사했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하나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빠가 하는 육아와 가사노동은 칭찬받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엄마가 하는 육아와 가사노동은?” 아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냉큼 오늘 있었던 일과 나의 질문을 함께 나눴다. 아빠의 육아와 가사노동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을 볼 수 있는 단면이라고 둘은 결론을 내린다.

아내와의 공평한 역할분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육아와 가사노동을 하는 아빠의 모습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그 가치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말이다. 육아와 가사노동의 가치를 매기기 이전에 나는 아빠의 참여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는 사회를 바라보게 됐다. 내가 바라보는 사회상은 성차별에 따라 자신의 역량의 범위가 한정지워지지 않는 사회다. 성에 따른 역할이 고정돼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딸이 엄마가 됐을 때는 전업으로 육아를 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인 직업을 가지면서도 육아에 대한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 성별의 차이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이 줄어들었으면 한다.

남성들의 육아휴직 비율이 아직은 새싹처럼 작지만 그 비율이 단순 증가하는 것으로만 사회가 바라보는 남성의 육아·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고 평가할 수 없다. 결국 경험과 공감의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함께하는 육아와 가사노동은 아내를 평생의 반려자이고 동지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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