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판결 : 서울고등법원 2015누71398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사건의 경과

이소정(가명)씨는 만 18세였던 2003년 2월부터 약 2년간,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반도체 사업부에서 ‘카파라인’ 오퍼레이터로 근무했다. 카파라인은 반도체 배선 재료를 구리로 대체하는 생산기술을 개발하는 곳으로서 여러 공정 설비들이 좁은 공간에 밀집돼 있었고, 수동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는 등 업무환경 면에서 일반 생산 라인과 다른 점이 많았다.

소정씨는 입사 전까지 매우 건강했고 질병에 관한 이력이나 가족력도 없었으나 퇴사 후 2개월 뒤 갑자기 실신한 것을 시작으로 시력 저하, 팔다리 감각 저하 등이 이어졌고 2008년 11월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다발성경화증은 중추신경계 조직에 다발적 손상이 일어나는 질환으로서 유병률이 10만명당 3.5명에 불과한 희귀질환이지만, 삼성전자 반도체·LCD 사업장에서 제보·확인된 발병자수는 총 네 명이다.

소정씨는 이 병이 반도체 공장의 업무환경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해 2011년 7월 산업재해 보상을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2012년 4월 “발병 원인이 명확하지 않고 유해화학물질 노출 정도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불승인했다. 소정씨는 이에 불복해 2013년 5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제1심 법원(서울행정법원)은 2015년 11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제2심 법원(서울고등법원)이 2017년 5월 이를 뒤집었다.

1심 판결의 요지 및 문제점

서울행정법원(이도행 판사)은 “다발성경화증은 발병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며 “유기용제 노출과 연관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일부 존재하나, 일관성이 없고 방법상의 편향성이 있어 믿기 어렵다”고 했다. 또한 “원고 직무·업무 내용 등에 비춰 유해인자 노출 빈도와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며 질병과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판결의 주된 문제점은 희귀질환에 대한 역학연구의 일반적 한계와 ‘카파공정’의 업무환경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아무런 근거 없이 법원에 제출된 세 건의 전문가 소견 중 피고쪽에 유리한 한 건의 일부 내용만을 받아들였고, 유기용제 노출을 판단하면서도 원고가 취급했던 여러 유기용제들 중 한 가지 제품만을 고려했다. 삼성전자가 제출한 ‘작업환경 측정 결과’에 근거해 “유해물질 노출 수준이 낮았다”고 결론 내면서 그 자료의 문제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재판 과정에서 법원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고용노동부 등이 업무에 관한 각종 자료들을 제출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도 아무런 규범적 판단을 하지 않았다.

2심 판결의 요지

서울고법(제2행정부, 재판장 김용석)은 먼저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규범적 관점에서 인과관계가 추단되면 족하다”는 대법원 판례를 적시하며, 다발성경화증과 같은 희귀질환의 업무관련성 판단 기준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희귀질병이어서 임상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발병원인으로 거론되는 요소들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현재의 연구 성과 등을 바탕으로 해서 근로자의 업무 전 건강상태, 구체적 업무형태, 질병의 발병시기 등을 고려하고, 여기에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취지와 사회보험제도의 목적 및 사회형평의 관념 등을 고려해 그 인과관계의 유무를 규범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법리에 비추어 보면, 발병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희귀성 질환의 경우에도 현재의 과학적 연구 성과 등을 통해 그 원인으로 거론되는 요소들이 업무환경에 존재하고, 근로자가 정상적인 업무 수행과정에서 그 요소들을 가지게 됐으며, 질병의 원인이 될 만한 다른 건강상의 결함이나 유전적인 요소가 밝혀진 바 없고, 업무수행 중 또는 그 직후에 질병의 증상이 비로소 나타났다면 일응 재해와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는 추단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아가 원고의 다발성경화증은 다음과 같은 사정들에 근거해 “업무로 인해 발병했거나 급격하게 악화됐다고 인정된다”고 했다. 첫째, 여러 연구 결과와 의학적 소견들을 종합했을 때 다발성경화증의 발병 요인으로 인정되는 3가지 환경 요인(햇빛 노출 부족, 유기용제 노출, 20대 이전의 교대근무)이 원고의 업무환경에 존재했다.

둘째, 클린룸의 밀폐된 구조와 좁은 공간에 여러 공정의 설비가 붙어 있었던 업무 환경, 작업장에서 사용된 다양한 화학제품과 그 성분 물질의 유해성, 삼성반도체 공장에 대한 진단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원고는 여러 유해물질에 상당 수준 노출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하는 삼성전자 제출 ‘작업환경측정 결과’는 측정 횟수, 측정 대상 물질 면에서 한계가 있다.

셋째, 이 병에 대한 각종 통계(유병률·평균 발병연령 등)와 삼성전자 반도체·LCD 사업장 내에서의 발병확인 사례(4명) 및 그들의 발병 연령을 비교해 보더라도 원고의 업무환경이 상병을 유발했거나 악화시켰다고 인정된다.

넷째, 법원에 제출된 의학적 소견들 중 다수도 이 병의 업무관련성을 긍정했고, 피고쪽 역학조사에서도 다수 의견은 업무관련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이 어렵다는 취지였다.

2심 판결의 의미

먼저 희귀질환에 대한 의학 연구의 일반적 한계를 고려했다는 점이다.(위에서 인용한 부분) 질병의 발병원인을 밝히는 역학 연구에서는 통계적 검증을 위해 충분한 숫자의 질병 발생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희귀질환은 그러한 연구 자체가 어렵다. 이러한 한계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희귀질환에 대한 산재보상 문제에서 명확하고 일관된 연구결과를 요구한다면, 모든 희귀질환은 산재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아주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된다.

다발성경화증의 경우 비교적 많은 역학연구들이 있었고, 특히 유기용제 노출, 20세 이전의 교대근무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일관된 연구 결과들이 나왔다. 원고쪽은 그 연구 결과들을 강조했지만 1심 법원은 “연구결과가 일관되지 않다” “연구 방법에 편향성이 있다”며 이들을 배척했고, 피고쪽도 “연구 결과들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다행히 최근 다른 사건에서 법원은 “유기용제 노출 등이 다발성경화증의 직업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인정된 견해”라고 했고(삼성전자 LCD 노동자의 다발성경화증 산재 소송, 서울행정법원 2013구단51919), 이 사건에서 서울고법도 비슷한 판단을 했다. 나아가 앞에서 길게 인용한 바와 같이 ‘희귀질환’의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때 “산재보험제도의 취지” “사회보험제도의 목적” “사회형평의 관념”까지 고려해야 한다며 한층 완화된 추단의 법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희귀질환 피해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재판부의 진지한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한 유해물질 노출 수준을 여러 간접 증거들을 통해 추단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거의 모든 반도체 직업병 사건에서 재해 당사자의 유해물질 노출 수준을 알 수 있는 직접 증거는 부존재하거나 턱없이 부족하다. 회사가 관련 자료를 제대로 생산하지 않거나 보관하지 않거나 은폐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전자는 법원의 제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업장의 ‘작업환경측정 결과 보고서 전문’과 ‘가스누출 감지시스템 작동 내역’ 등을 제출하지 않았다. 피고와 1심 법원이 강력한 증거로 삼았던 회사 제출 ‘작업환경측정 결과’는 원고 근무기간 동안 단 한 차례, 수십여 종의 취급 물질들 중 단 8개 물질만 측정한 자료였고, 측정기관, 측정방법도 밝히지 않아 그 진위조차 의심되는 자료였다.

이러한 자료 부존재 혹은 부족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모든 반도체 직업병 사건의 핵심이다. 1심 법원은 재해자 입증책임 원칙의 형식논리를 앞세워 그러한 상황을 노동자쪽에 불리하게 해석했지만 서울고법은 달랐다. 클린룸의 밀폐된 구조, 카파공정의 특수성 등 여러 간접 정황들을 통해 유해물질 노출 수준을 추단하면서 회사 제출 ‘작업환경 측정 결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회사가 원고의 업무환경에 관한 자료를 제대로 생산하지 않거나 은폐한 상황에 대한 규범적인 평가가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근로복지공단은 이번 판결에 승복했다. 소정씨의 다발성경화증이 삼성반도체 공장의 업무환경에서 기인한 직업병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현대 의학은 대부분의 희귀질환에 대해 그 발병 원인은 물론 치료기술조차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로 인해 직업병으로 의심되는 희귀질환에 걸린 노동자들은 끝을 알 수 없는 투병 생활을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린다. 현대 의학의 한계가 노동자에게 ‘치료’와 ‘보상’ 면에서 이중의 고통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보상보험의 적용 여부를 판단하면서 더 이상 의학적 관련성 판단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이번 판결이 그러한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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