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집배노조 조합원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0일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잇따른 집배원 사망 사건의 진상 조사를 위한 국민조사위원회 구성을 정부에 요구했다. 정기훈 기자

20년 넘게 일한 일터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집배원 원영호(47)씨가 끝내 사망했다. 올해만 7명의 집배원이 목숨을 잃었고, 위탁택배원과 계리원을 포함하면 모두 12명이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 2건을 제외하면 10명이 목숨을 끊거나 과로사로 사망했다. 잇단 우정노동자 사망사건과 관련해 국민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노조 “업무 과부하에 '통구' 원인”=10일 집배노조와 원씨의 동료 집배원들의 말에 따르면 원씨는 지난 6일 우체국에 못 나간다고 전화한 뒤 배달구역 주민들을 찾았다. 그는 7년간 담당한 구역 주민들에게 “이제 우체국을 그만뒀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원씨의 동료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원씨는 주민들에게 “우체국을 다니기 싫다”고 말했다. 주민들과 인사를 마친 원씨는 같은날 오전 11시 20년간 일한 안양우체국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노조는 원씨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지난달 26일 원씨가 속한 팀은 재개발로 담당구역이 확대되자 팀원 간 구역 조정을 했다. 이 과정에서 원씨는 기존에 맡던 구역을 재조정하는 수준이 아닌 완전히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는 '통구'를 당했다. 원씨는 구역조정 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 관계자는 “새 지역에 대한 견습이 3일 정도 이뤄졌지만 형식적인 수준에 불과했다”며 “현실적으로 제대로 된 배달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평소 강한 책임감을 가진 원씨가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원씨는 휴일에도 담당구역 지리를 익히기 위해 새로 맡은 구역을 돌며 손수 지도를 그렸다. 그는 통구 이후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원씨가 소속된 안양우체국 집배부하량(1.154)은 경인청 평균(1.132)보다 높다. 경인지역은 전국에서 업무량이 많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노조는 “안양은 재개발·신도시 난개발로 세대수가 늘고 있지만 적정인력 충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집배원 1명을 증원한 안양우체국은 위탁 비정규 노동자 2명을 추가 증원할 계획이다.

노조 관계자는 “이번 과로자살은 충동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며 ”우정사업본부의 인력 쥐어짜기나 현장과 괴리된 집배부하량 시스템이 과로자살의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 살인기업 뽑힌 우정본부, 조사위 구성은?=집배원들은 하루 평균 2천건의 우편물과 택배를 처리한다. 노조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집배원 사망사고 9건 중 7건이 과로사다. 지난해 7월 노동자운동연구소 조사 결과 집배원 1인당 실노동시간은 2천888시간이고, 연평균 655시간을 초과근무했다.

지난해 양대 노총과 <매일노동뉴스> 등이 뽑은 ‘최악의 살인기업’ 명단에 오른 우정본부의 산업재해율은 한국 평균 산재율의 2배가 넘는다. 2015년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일반 노동자 재해율은 0.5% 수준인 데 반해 우정사업본부 재해율은 1.03% 수준이다. 두 달에 한 명꼴로 집배원이 과로로 돌연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일 “대형 인명사고의 경우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1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집배원이 과로로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며 “경찰관·부사관·군무원·집배원·가축방역관까지 합쳐 국민 안전과 민생현장에서 일할 중앙과 지방공무원 1만2천명을 충원해 민생서비스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거듭된 우정노동자 사망사고에 국민조사위원회 구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노조와 시민·사회단체는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우정노동자 사망 문제를 조사할 국민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 이들은 “과로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며 “우정본부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수십명의 집배원이 사망하고 있는 중대재해 다발사업장”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우정본부는 재발방지 의지가 전혀 없다”며 “국민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 노동조합이 참여한 객관적인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