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전국새마을금고노조는 1990년대부터 존재했던 소산별노조다. 노조 중앙이 서울이 아닌 부산에 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민주노총 부산본부에 더부살이한다.

필자가 2000년 민주노총 부산본부에서 교육선전국장으로 일할 때 새마을금고노조는 최낙천 위원장이 이끌었다. 키 작고 늘 차분한 목소리의 그는 힘겨운 싸움을 이어 갔다. 거제1동·온천2동 등 금고마다 조합원은 고작 7~8명 수준에, 좀 큰 금고라도 20명을 넘기 어려웠다. 새마을금고 노동자들은 늘 이사장의 전횡에 쪼그라들어 있었다. 저임금은 물론이고, 노조만 만들면 탄압받기 일쑤였다. 여성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에 봉건 영주 같은 이사장 때문에 많은 직원이 성희롱에 노출돼 있었다.

혼자 파업하다가 깨지기 십상인 새마을금고노조를 지켜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0년 최낙천 위원장은 궁리 끝에 부산 동래구와 연제구에 있는 몇몇 금고를 묶어 공동파업에 들어갔다. 파업 출정식을 거제동금고(정확히 거제 몇 동인지는 모르겠다) 앞에서 열었는데 경찰이 먼저 진을 치고 비켜 주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맨 머리띠를 어색해하면서도 꽤 많은 여성조합원이 경찰 바리케이드 너머로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서 있는 관리자들의 따가운 눈길을 받으며 연좌했다.

새마을금고는 금융업이라 금융위원회 관리·감독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행정자치부의 관리·감독을 받는다. 금융업에 전문지식이 없는 부처가 관리·감독을 하다 보니 황당한 일도 많았다. 대부분 지역토호들이 장악한 금고 이사장은 구의원·시의원·국회의원으로 가는 정거장쯤으로 여겨졌다. 금융업에 전문적 식견이나 사업전망조차 없는 이도 제법 있었다. 90년대 초부터 뽑히기 시작한 지방의원 대다수가 자유총연맹·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새마을운동협의회라는 3대 관변단체에 다리를 걸친 인물이라지만, 새마을금고 이사장도 이들 3개 단체 못지않게 지방의회에 많이 진출했다.

서슬 퍼런 80년대 초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본부 사무총장을 하면서 바짝 키운 게 새마을금고다. 그래서 태생적 한계도 강하다. 결국 전경환은 88년 새마을금고 공금 76억여원을 횡령해 구속됐다. 윗대가리부터 새마을금고 돈을 제 주머니 쌈짓돈쯤으로 여겼으니 개별 금고 이사장의 횡령 등 재정비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런 곳에서 노조를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나.

부산을 떠나온 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새마을금고노조를 지난 11일 한겨레신문 14면에서 봤다. '새마을금고 창구직원 725명 정규직 된다'는 제목의 기사에는 20여년 만에 다시 들어보는 ‘전국새마을금고노조’란 반가운 이름도 실렸다.

한겨레는 행자부와 새마을금고중앙회가 비정규직으로 일해 온 새마을금고 창구수납직원 725명을 정규직화한다는 발표를 받아 적었다. 20년 전 새마을금고는 19세기 머리를 단 이사장 밑에서 온갖 설움을 받고 일했지만 비정규직은 아니었는데. ‘그사이 여기도 비정규직이 우후죽순 늘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미안했다.

진보연하는 인사들, 특히 연구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가 가당키나 하냐고 힐문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그들은 어느 사회라도 일정한 비율의 비정규직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세상을 바라봤다. 불과 20년도 안 된 과거에 새마을금고엔 비정규직이 아예 없었다. 우리 사회가 비정규직을 사용한 지 불과 20여년밖에 안 됐는데 이젠 비정규직을 당연한 걸로 받아들인다. 결코 정상이 아닌데도.

87년 체제가 만들어 낸 우리 노동법 어디에도 ‘비정규직’이란 단어는 없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마름 역할을 했던 이들조차 자기 직원만큼은 정규직으로 사용하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연구자들이 어떤 시그널도 보내지 않는 사이에 노동시장은 비정규직 천지가 됐다. 이제 와서 시혜 베풀 듯 내민 행자부와 새마을금고 중앙회의 발표는 생뚱맞다. 지난 20여년 사이 신산했을 금고노동자들의 노동에 다시 한 번 머리 숙인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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