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국장

부끄러운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지난해 8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일본 교토 단바망간기념관에 ‘일제강제징용 조선노동자상’을 세웠다.

노동자상에는 "눈 감아야 보이는 조국의 하늘과 어머니의 미소, 그 환한 빛을 끝내 움켜쥐지 못한 굳은살 밴 검은 두 손에 잊지 않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는 추모 비문이 적혀 있다.

나의 부끄러움은 비문 내용 중 ‘조국’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비문을 지은 당사자로서 당시에는 큰 고민 없이 이 단어를 선택했다.

하지만 최근 영화 <군함도> 개봉을 앞두고 하시마섬 자료를 접하다가 1년 전에 쓴 비문이 너무나 안일한 생각의 발로였음을 깨닫게 됐다.

군함처럼 생겨서 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섬에는 1943년부터 45년까지 약 800명의 조선인 광부가 있었다. 그들은 지하 1천미터, 바닷물과 메탄가스가 쏟아지고 섭씨 40도가 넘는 비좁은 탄광 속에서 석탄을 캤다.

지옥 같은, 아니 지옥의 섬에 갇혀 2교대로 12시간을, 어떤 때는 8시간씩 두 번 16시간 강제노동을 했던 그들에게 ‘조국’이 있었을까. 콩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이것은 보통 비료로 쓰인다)에 잡곡을 조금 섞은 콩깻묵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운 그들에게 가고 싶은 ‘조국’이 있었을까. 죽음에서 탈출하기 위해 죽음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는 노동자들이 가고 싶어 한 곳은 ‘조국’이 아닌 ‘고향’이었다. 노동자들이 탄광 벽에 새긴 ‘비명’은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는 "눈 감아야 보이는 조국의 하늘"이라고 썼으니 이 얼마나 무지한 짓이었나.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시마섬 외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을 강제로 징용하거나, 모집 또는 알선이라는 명목으로 속여 일본으로 데려갔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면서부터는 강제로 징용됐다. 또 44년 일제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시행해 수십만명의 조선 여성을 군수공장이나 위안부 등으로 강제 동원했다. 적게는 13세 아이부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최소 100만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일본 땅에서 희생됐다.

한국노총은 민주노총과 함께 서울 용산역 앞에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사업을 진행 중이다. 용산역은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집결시킨 장소다. 어쩌면 노동자들에게는 지옥으로 가기 전 마지막 땅이었을지도 모를 곳이 바로 용산역이다.

이전 정부에서는 노동자상 건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다행히 정권이 교체된 후 양대 노총은 다시 사업을 재개했으나 여전히 국토교통부는 확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켜 줄 조국, 기댈 수 있는 조국이 없었던 그들에게 70년이 훌쩍 넘어 버린 지금 우리 정부와 이 나라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은 너무나 명확하다. 노동자상 설립은 가장 기본적인 사업이며 이를 통해 더 많은 국민이 지난 역사를 잊지 않게끔 해야 한다. 게다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 노동자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노동단체가 나서 한다고 하니, 이것은 막을 일이 아니고 도울 일이기도 하다.

현재의 조국이 과거의 노동자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면 1년 전 나의 부끄러움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국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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