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한국 노동운동에는 기피하는 단어가 있다. 개량·타협·양보 등이 그것이다.

노동운동의 모태가 된 1980년대 혁명주의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총파업·봉기로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노선에서 볼 때 체제 안 개혁에 머무르는 개량주의는 배격 대상이었다. 체제와 타협하는 노선으로 비판받았다. 정파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방법으로 다른 정파들에게 개량주의 딱지를 붙였다. 운동가들은 제 이마에 개량 딱지가 붙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개량·타협·협조 등은 기피 단어가 됐다.

노사관계 당사자인 자본의 책임도 크다. 자본은 제 곳간에 더 많은 돈을 쌓으려고 시도 때도 없이 노조의 양보를 주문했다. 역대 정부 책임도 크다. 역대 정부는 노사갈등이 발생하면 원인을 따지기 전에 자본 편부터 들고 노조의 타협과 양보를 압박했다.

운동노선과 자본·정부가 중첩시킨 영향이었다. 기피 단어에 이성·감성·심리적 거부감이 켜켜이 쌓였다. 노동운동에서 대안을 내놓으며 양보·동결·타협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개량주의자라 고백하는 꼴이 됐다. 심하면 자본·정부 편으로 낙인찍히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30여년이 흘렀는데, 노동운동은 이율배반에 빠졌다. 그런데 이율배반은 노동운동이 뒤늦게 깨닫거나 아직 깨닫지 못해서 문제일 뿐이지 예정된 결과였다. 이율배반은 한국 노동운동이 근간으로 삼고 있는 노동조합운동의 작동 원리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조는 타협·협조·개량으로 고착된다. 산별노조와 총연맹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운동이 얼마나 급진적으로 주장하는가와 상관없이 필연적 경로다. 노조는 노동자의 임금·복지·고용 등의 처지 개선을 우선 과제로 삼는다. 투쟁의 기본 목표도 처지 개선이다. 즉 개량의 확장이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을 타협과 협조로 고착시킨 것은 다름 아닌 해마다 치르는 임금인상투쟁이었고, 격년으로 치르는 단체협약투쟁이었다. 30년의 과정에서 전국을 흔드는 파업과 화염병으로 격렬하게 투쟁한 적도 있지만, 그것도 적절한 선의 개량과 타협을 목표로 한 투쟁이었다. 실제로 조합원 처지가 개량되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했고, 그런 뒤에는 그것을 지키려 체제에 협조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노동조합은 개량의 확보라는 목표에 장벽이 있으면 혁명에 나서지만 반동의 편에 서기도 한다는 것이 세계사의 교훈이다. 혁명에 서는 경우에도 조건이 있는데, 노동자계급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자본의 지불능력이 턱없이 부족할 때다. 한국은 30년 넘도록 세계 10위대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다. 음식쓰레기가 넘쳐 나서 골치인 사회다.

체제 전복을 바라며 노동운동에 뛰어든 혁명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노동조합 투쟁은 야속하게도 체제에 대한 비타협과 혁명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투쟁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노동조합운동의 원리를 깨달은 유럽의 일부 혁명주의자들이 거기에 허비하는 제 인생이 아깝다며 노조를 떠난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나마 유럽 노동조합운동은 산별노조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개량을 균등하게 확보해 왔다.

그러나 기업별노조 체제에 묶인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 즉 울타리 안 조합원 개량에만 집착하는 질곡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중심부 노동조합이 임금투쟁을 세게 하면 할수록 주변부 노동과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민주노총과 산별연맹이 최악의 상태를 막으려 연대임금·최저임금 등을 설파하며 실천하지만, 중심부 울타리 안 개량의 단맛에 빠진 조합원을 설득하지 못해 쩔쩔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청노동·비정규직·청년실업·기간제교사 등 주변부 노동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장벽이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 체제에는 양보·타협·협조하면서, 노동자끼리는 양보도 타협도 협조도 없는 것이 대한민국 노동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자유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듯, 양보와 타협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떤 양보고 어떤 타협이냐를 따져야 한다. 그것이 사회과학이다. 재벌과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들까지도 중심부·주변부 할 것 없이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한 극단의 경쟁사회에서 나눔·양보·타협 등은 노동운동이 기피해야 할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중심부 노동자에게, 아니 모든 노동자에게 양보와 타협 정신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는 정규교사(지망생)의 양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녕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한다면, 정규교사보다 기간제교사에게 시간당 임금을 더 많이 주는 제도로 타협하자고 해야 한다.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정착된 제도다. 그러면 국가의 지불능력에 한계가 발생할 것이기에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할 것이며, 이 또한 내 몫의 양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사회를 향해, 중심부 노동자를 향해, 조합원을 향해 이것을 설득해야 한다.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 반대 논리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면, 노동 분단의 극복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하루속히 이율배반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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