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루빨리 쓸모없어지길 바라며 지은 집이 있다. 2년 동안 7억원이 넘는 마음이 모여 집짓기가 시작됐고, 올해 4월 첫 삽을 뜬 뒤 1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사판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만든 집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이자 연대의 공간이 될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이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주택가에 세워진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의 외관. <정택용 작가>

십시일반 모금과 재능연대로 지어진 꿀잠

지난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주택가에서 열린 '꿀잠' 개관식은 마을 잔칫날을 방불케 했다. 만장을 앞세운 풍물패 길놀이 뒤로 김소연 꿀잠 상임운영위원이 주민들에게 시루떡을 나눠 주며 개관 소식을 알렸다. 개관식을 찾은 손님들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뒤따랐다. "내 집 마련한 것보다 더 좋다"는 추임새도 나왔다.

이날 개관식에는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삼표동양시멘트 비정규직·아사히 비정규직·KTX 비정규직·콜트콜텍·하이디스·쌍용자동차·파인텍 등 꿀잠이 필요한 비정규직·해고노동자들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비롯해 꿀잠 짓기에 마음을 모아 준 사람 200여명이 함께했다.

꿀잠 이사장인 조현철 신부는 "맨손으로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이 현실이 됐다"며 "꿀잠은 가장 치열한 이들에겐 외갓집 앞마당이며, 지치고 피곤한 이들에겐 쉬고 보니 더 든든해진 동지사랑의 사랑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신부는 "모든 여정에 함께한 우리 모두가 꿀잠의 주인공들"이라며 손님들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렸다.

지난 19일 오후 ‘꿀잠’ 개관식에 앞서 풍물패가 길놀이를 하고 있다. <정택용 작가>

꿀잠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재능연대로 세워진 국내 첫 비정규 노동자 쉼터다. 2015년 7월 비정규직 투쟁을 지원하고 연대하는 쉼터와 진지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처음 제안됐다. 같은해 12월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취지에 공감한 2천여명이 7억6천여만원을 모았다. 올해 4월 다세대주택 리모델링에 착수했다. 5월11일 철거를 시작으로 하루 평균 10명 이상이 찾아와 힘과 시간을 연대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일 만에 문을 열었다.

꿀잠 설계를 책임졌던 건축가 정기황씨는 "이렇게 주인이 많은 집은 처음"이라며 "(일반인들이 집을 지어) 보통 공사현장보다 (완공이) 많이 늦어졌지만, 되돌아보니 정말 뿌듯한 작업이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자칭 타칭 '꿀잠 목공반장'으로 불린 금속노조 콜텍지회 조합원 김경봉씨는 "10년간 거리에서 투쟁하느라 힘들었는데, 꿀잠을 만들면서 힐링이 됐다"며 "꿀잠 곳곳에 제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고 말했다.

‘꿀잠’ 개관식에서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노동자들이 고사상에 꿀잠의 무탈을 기원하는 술을 올리고 있다. <정택용 작가>

꿀잠은 전세임대 중인 2·3층을 제외한 1층과 4층, 옥탑, 지하 1층 공연장·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쉼터인 4층에는 최대 13명이 잘 수 있는 방 3개가 있다. 방마다 단잠·온잠·굳잠이란 이름이 있다. 5명이 동시에 씻을 수 있는 샤워실 '멱'도 갖춰져 있다. 옥탑에는 네댓 명이 잘 수 있는 여성 쉼터 '푹잠'과 옥상정원 '꽃밭'이 있다. 옥탑에도 샤워시설·세탁기·냉장고가 완비돼 있다. 1층에는 카페 겸 식당인 '카페 꿀잠'과 장애인 쉼터 '잠콜'이 있다.

꿀잠의 자랑은 전시공간과 문화교육공간이 있는 지하 1층이다. 빔프로젝트와 질 좋은 음향장비가 구비돼 있다. 영화상영과 문화공연이 가능하다. 벌써부터 꿀잠에서 공연을 할 수 있냐는 문화예술인들의 문의가 끊이질 않고 있단다.

다음달부터 지하 강당에서 현직 기자들이 참여하는 '비정규 노동자 글쓰기·언론교실'과 비정규 노동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노동 역사 하루 기행'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다리 쭉 뻗고 꿀잠 잘 수 있을 것 같다"

"에어컨이 있다던데, 그게 기대되네요."

"SNS에서 봤는데, 호텔급이란 소문이 있던데요?"

‘꿀잠’ 4층 쉼터를 둘러보는 사람들. <정택용 작가>

개관 첫날 1호 투숙객이 된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 조합원 윤효선씨와 김덕희씨가 한껏 들뜬 얼굴로 꿀잠 구경에 나섰다. 유난히 더웠던 올 여름, 서울 여의도 국회 농성장에서 고작 선풍기 한 대로 더위를 견딘 이들에게 에어컨이 완비된 꿀잠은 호텔이나 다름없는 듯했다.

윤씨는 "여의도 농성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씻는 문제였다"며 "정동에 있는 금속노조까지 씻으러 가곤 했는데, 이제 가까운 꿀잠을 자주 이용하게 될 것 같다"고 좋아했다. 김씨도 "지친 몸과 마음을 눕히면 정말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라두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장은 "투쟁사업장들이 많아서 그런지 요즘 금속노조 4층이 꽉 차서 잘 곳이 없다"며 "이런 쉼터가 아쉬웠는데 많이 이용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윤충렬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수석부지부장은 "꿀잠이 비정규직 쉼터 기능으로 남기보다는 사람들에게 '그 옛날 비정규직이란 것도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려 주는 박물관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지하 1층 공연장에서 꿀잠꾸러기들이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정택용 작가>

꿀잠은 비정규 노동자와 해고노동자, 투쟁사업장 노동자, 비정규 활동가들에게는 언제든 무료로 개방된다. 그 밖에는 소정의 연대기금을 내면 사용할 수 있다. 운영세칙이 이렇다 보니 재정이 문제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대출받은 3억원의 이자 상환금으로 매달 100만원이 지출된다. 매달 550여명의 후원회원이 납부하는 600여만원으로는 식사비와 운영비, 상근자 활동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김소연 상임운영위원은 "CMS 후원이 절실하다"며 "계속 마음을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꿀잠 후원계좌는 1006-701-442424(우리은행·사단법인 꿀잠)이다. 후원·이용 문의는 꿀잠 사무국(02-856-0611)에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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