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노총

정부도 노동계도 "노동존중 사회"를 외친다. 수십 년간 적폐가 쌓인 한국 사회.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려면 손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툭하면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만큼 국제기준과 거리가 먼 분야도 드물다. 실제 한국 노동지표는 국제노동기준을 한참 밑돈다. 노동존중 사회로 가려면 국제노동기준부터 지켜야 한다. <매일노동뉴스>가 네 차례에 걸쳐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1. 노동기본권 국제노동기준
2. 좋은 일자리 국제노동기준
3. 노동존중 사회는 노동존중 도시로부터
4. 노동전문가 릴레이 인터뷰


좋은 일자리란 무엇인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좋은 일자리가 세계적 화두로 자리 잡았다.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를 완화하고 사회통합을 이루려면 금융위기 여파로 줄어든 일자리를 늘리고 먹고살 만한 노동조건을 보장하는 게 중요했다.

너도나도 좋은 일자리를 외치지만 이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저마다 주관에 따라 원하는 것이 달라서다. 누군가는 월급 많은 일터를, 다른 누군가는 고용이 안정된 직장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아실현을 위한 직업을 좋은 일자리라 정의한다.

주관뿐만이 아니다. 일과 일자리는 사회적 관계로 얽혀 있다. 돈을 많이 주는 안정된 일자리라도 인격을 무시당하고 종속적으로 일한다면 좋은 일자리로 보기 어렵다.

세계적 추세는 '디센트 워크'
좋은 노동조건뿐 아니라 일할 권리도 보장


국제사회는 디센트 워크(decent work)라는 표현으로 좋은 일자리를 정의한다.

디센트 워크는 후안 소마비아 전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이 1999년 처음 주창했다. 소마비아 사무총장은 그해 ILO 총회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정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생산적이고 좋은 일자리를 남녀 모두에게 제공해야 한다"며 "디센트 워크야말로 ILO가 달성해야 할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디센트 워크를 "권리가 보호되고 충분한 소득을 창출하고 충분한 사회적 보호가 보장되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생산적인 노동"으로 정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양질의 노동이나 좋은 일자리 혹은 인간적인 일자리 정도로 번역한다.

ILO는 디센트 워크 개념을 전략적 목표와 함께 구체화했다. 전략적 목표로는 △고용 기회(employment opportunities) △일터에서의 권리(rights at work) △사회적 보호(social protection)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를 제시했다. 네 가지를 모두 갖춰야 디센트 워크, 즉 좋은 일자리다.

고용 기회는 모든 종류의 노동, 다시 말해 일자리 양과 질을 뜻한다. 측정지표는 경제활동참가율이나 고용률·실업률, 보수의 적정성이나 노동시간이다. 일터에서의 권리는 노동 3권 보장 수준을, 사회적 보호는 고용·산재보험 같은 사회보장과 안전한 일터 조성을 위한 사회적 노력을 의미한다.

사회적 대화는 노동자들이 경영참여나 노사정 협상을 통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자신의 이해를 사회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임시직·저임금 많고 장시간 노동까지
우리나라 일자리 질 크게 떨어져


ILO는 이를 11개 측정지표로 세분화했다. 유럽연합(EU)은 유럽 상황에 맞게 10개 범주로 구분한 고용의 질(Quality of Work) 측정지표를 만들어 발표한다. 두 가지가 지금까지 좋은 일자리 국제노동기준으로 쓰인다.

우리나라 일자리 양과 질에 관한 통계지표는 어느 정도로 평가될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비교하면 그다지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한다. 그나마 양적 지표에서는 국제사회와 엇비슷한 수준을 보였지만 질적 지표는 크게 떨어진다.

2015~2016년 통계청과 OECD가 발표한 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고용률(만 15~64세)은 지난해 기준 66.1%다. OECD 평균(68.4%)보다 2.3%포인트 낮다. 실업률은 3.8%로 OECD 평균(7.5%)과 비교해 나쁘지 않은 수준을 보였다.

다만 경제활동참가율은 우리나라(68.7%)와 OECD(평균 73.9%) 회원국 간 차이가 컸다. 여성들이 출산·육아로 경제활동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강한 데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보다 나은 직장에 가기 위해 취업을 미루고 공부하는 취업준비생이 많아서다.

일자리 질에 관한 지표는 더욱 좋지 않다. 2015년 기준 임시직(temporary employment) 비중은 21.7%로 OECD 평균(11.1%)보다 두 배가량 높다. 비교 가능한 OECD 회원 30개국 중 칠레(29.2%)·폴란드(28.4%)·스페인(24.0%)·네덜란드(21.7%) 다음으로 임시직이 많았다.

연간 평균 임금은 각 나라 환율·물가를 반영한 구매력 평가(PPP) 기준 3만3천110달러로 OECD 회원 34개국 중 23위였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3.9%로 15개 회원국 중 1위였다.

그럼에도 지난해 기준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천69시간으로 32개국 중 멕시코(2천255시간) 다음으로 길었다. OECD 평균(1천764시간)에 비해 하루 8시간 기준 38일을 더 일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는 임시직과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높고 장시간 일하지만 연간 임금수준은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10만명당 산재사망자는 7.3명으로 17개국 중 1위였다. 일하는 곳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얘기다.

노동권 보장·사회적 대화 기대 이하
노조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은 꼴찌 수준


일터에서의 권리가 보장되거나 사회적 대화가 활성화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노동 3권을 헌법에서 보장한다. 그러나 노조조직률은 10% 안팎에 불과하다. 헌법에서 보장한 권리를 전체 노동자 중 10%만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OECD 회원 34개국 중 우리나라보다 노조조직률이 낮은 나라는 터키(4.5%)·에스토니아(6.4%)·프랑스(7.7%) 세 나라밖에 없다. 하지만 프랑스는 임금·단체협약 적용률이 92%에 이른다. 조직률은 낮지만 노동자 대다수가 노조의 보호를 받는다.

반면 우리나라 임금·단체협약 적용률은 10% 안팎으로 노조조직률과 거의 같다. 산별노조 중심인 유럽은 개별 기업에 노조가 없더라도 노동자들이 산업별 임단협을 적용받지만 기업별노조 중심인 우리나라는 노조가 있는 기업의 조합원만 임단협을 적용받는다. OECD 평균 임금·단체협약 적용률은 53.6%다. 우리나라는 비교 가능한 OECD 회원국 17개국 중 임단협을 적용받는 노동자 비중이 가장 적다.

사회적 대화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가 98년 설립된 뒤 19년째 맥을 이어 오고 있지만 2000년 중반 이후로는 실효성 있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거나 합의했더라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 단위 중층교섭이나 지역별 사회적 대화가 활성화돼 있지도 않다. 노동자 경영참여는 지난해 말 서울시가 근로자이사제를 도입하면서 걸음마를 뗐다.

고용·노동기준 관련 ILO 전문협약
핵심협약에 밀려 비준 계획조차 없어


우리나라는 ILO가 권고한 핵심협약은 물론이고 고용·노동기준과 관련한 전문협약 상당수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좋은 일자리와 관련한 국제노동기준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ILO는 1919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189개 협약을 채택했다. 2011년 6월 100차 총회에서 채택한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협약(189호)이 가장 최근에 만든 협약이다.

우리나라는 이 중 29개 협약만을 비준했다. OECD 회원국들은 평균 61개를 비준한 상태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ILO 핵심협약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98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29호)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105호) 비준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고용·노동기준과 관련한 전문협약 비준 계획은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을 보호하기 위해 49년에 채택된 임금보호 협약(95호)은 "동거하는 친족만을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과 가사 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근로기준법 11조가 걸림돌로 작용한다.

14호 주휴 협약(공업)은 "제조업을 포함한 공업 종사들에게 1주일에 최소 연속으로 24시간 휴식을 부여하고 모든 노동자에게 이를 공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0인 미만 사업장에 취업규칙 작성의무를 부여하지 않고 있어 전체 공지의무를 지키지 못한다. 협약을 비준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나마 임금보호 협약과 주휴 협약은 몇 가지 법·제도만 보완하면 비준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우리나라는 2011년 주 40시간 협약(47호)을 비준한 바 있다.

반면 사회보장 협약(최저기준·102호)·균등대우 협약(사회보장·118호)·고용촉진과 실업방지 협약(168호)·모성보호 협약(183호) 같은 고용·사회보장 관련 협약과 노동자 청구권 보호 협약(사용자 파산·173호)·야간근로 협약(171호)·단시간근로 협약(175호) 등 노동기준 관련 협약은 비준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다.<표 참조>

노동자 청구권 보호 협약은 사용자 파산시 체불임금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보호

범위가 임금·퇴직금으로 한정돼 있고 보장 기간 역시 3개월로 짧다. 협약이 권고하는 보장 기간은 6개월이다.

야간근로 협약을 비준하려면 "야근근로를 줄여 나겠다"는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야간근로가 가능하다. 야근근로 제한 범위도 임산부·연소자로 국한돼 있다.

고용촉진과 실업방지 협약은 고용촉진을 위한 직업훈련 등 고용정책을 정부가 수립·시행하고 실업자 보호를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실업자 보호 범위가 협약이 요구하는 수준에 못 미친다.

ILO 모성보호 협약은 우리나라가 보장하는 산전후휴가(90일) 외에도 산후질병휴가와 휴가복귀 후 동일업무 보장 같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다 엄격한 보호를 요구한다.

"ILO 전문협약 비준하라"
디센트 워크 실현 위한 과제


양대 노총은 최근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정부는 ILO 회원국이자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ILO 핵심협약 비준을 촉구했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이 함께 참석할 정도로 비중이 큰 기자회견이었다.

그런데 고용·노동기준 관련 ILO 전문협약 비준까지 촉구하지는 않았다. 핵심협약조차 비준하지 않은 한국 현실에서 전문협약 비준은 현실 가능성이 너무 낮다고 판단해서다. ILO 전문협약 관련 연구도 2010년 노동부 의뢰로 한국노사관계학회가 진행한 '주요 ILO 협약 비준을 위한 국내 법·제도 비교 검토'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ILO가 추구하는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부가 ILO 핵심협약과 고용·노동기준 관련 전문협약을 비준하고, 거기에 맞춰 국내 법·제도를 손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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