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한 청년이 있다. 청년은 지난겨울 촛불을 들었다. 행진도 했다. 목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구호를 외쳤다. 박근혜를 탄핵하라, 세월호를 인양하라. 청년이 많이 외친 구호였다. 함께 외친 구호가 있었다. 비정규직 철폐하자, 공정사회 건설하자. 마침내 박근혜는 탄핵됐고 감옥에도 갔다. 이어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됐다. 청년도 투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고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공항을 찾아가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했다. 비정규직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뉴스로 소식을 접한 청년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지난겨울 촛불 속에 있었던 자신이 뿌듯했다. 새로운 정부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도 봤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청년이 몸담고 있는 사업장에서도 비정규직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노조와 경영진이 방안을 찾고 있었다. 청년은 고민에 빠졌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다. 동료들과 술잔도 기울여 봤다. 그러다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몸담은 사업장에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하더라도 정규직과 동일한 처우로 개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청년은 노조 토론회에 가서 발언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실화다. 그 청년은 어떤 한 공공기관의 정규직 노동자다.

청년이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이렇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거나 비정규직 처우를 정규직에 맞춰 개선하면 인건비 총액이 늘어난다. 그것을 맞추려면 예산을 충분하게 받아야 하는데, 국가·지자체 예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정규직에게 고용 문제가 발생하거나 임금 손해가 생긴다.

그래서 청년은 이렇게 주장했다. 정규직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했다. 비정규직은 그런 절차가 없었다. 그런 절차 없이 정규직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업무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비정규직 처우를 정규직과 동일하게 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어디 이 청년만의 문제인가. 교사·공무원·공공기관·대기업 등 고용과 임금이 보장된 이른바 중심부 직장에서 일하는 이 시대 정규직 노동자의 보편 정서다. 내 고용의 방패막이가 필요해서, 또 내 임금이 손해 볼 것 같아서, 또 나는 치열한 입사 경쟁을 뚫고 취업했기에, 또, 또, 저마다의 이유로 내 영역에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처우개선에도 나서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비극이다. 대한민국의 저주다.

그 청년이나 중심부 사업장 정규직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책임은 재벌과 역대 정부에 있다. 그들이 판을 이렇게 만들었다. 노동운동은 재벌과 역대 정부에 맞서 투쟁했다. 그 역할은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노동운동에도 있다. 각 영역에서 벌어지는, 자기 임금·고용만 챙기는 활동에 적당히 눈감았다. 노동자 간 임금격차가 10배까지 벌어지는데, 주력 조합원의 처지가 상위 10%에 들어간 상태인데도, 노동운동은 연대임금을 중심 기조로 삼지 못했다. 노동자끼리의 나눔·양보·타협을 중심 기조로 삼지 못했다. 그 업보가 참교육을 실현해야 할 학교 현장에서 부딪혔다. 숱한 불안정 청년의 울분으로 쌓이고 있다.

그 성찰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일대 전환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제안·실천이 있었다. 양대 노총 공공부문 노조들이 성과연봉제 인센티브 1천600억원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했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가 정규직 임금인상분의 상당액을 내놓기로 했다. 수백억원에 달할 것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지부·지회들이 통상임금 소송을 중단하고 노사가 각 2천500억원씩 내놓자고 제안했다. 용도는 비정규직 처우개선과 청년일자리 창출이다. 노동자들이 자기 몫을 내놓는 것이다. 노동운동에서 싹트는 희망이다. 움켜잡아야 한다.

노동운동은 안팎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이 사회가 내 몫의 양보를 통해서라도 비정규직 문제, 하청노동자 문제, 불안정 청년 문제를 풀자고 설득해야 한다. 사업장 안에서는 조합원 반대가 있더라도 계속 시도해야 한다. 노조 선거에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개별 단위에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제도를 바꾸는 실천에 노동운동의 힘을 모아야 한다. 복지·증세에 노조가 앞장서야 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시간당 임금을 더 받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중심부 직장에 진입하지 못하더라도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을 수 있는 보장만 된다면, 교사 응시생이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증세가 돼서 국가·지자체 예산의 운영 폭이 넓어진다면, 그 청년이 자기 사업장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퇴직을 해서도 복지가 보장된다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제 임금을 양보해서라도 비정규직과 손을 잡을 것이다. 해답은 여기에 있다.

노동운동은 제도와 정책 속으로 깊숙이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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