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나영 기자
“지금 안고 있는 피켓 내용은 삼성전자 반도체·LCD공장에서 일하다 20·30대에 백혈병·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얼굴과 약력입니다."

방진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영정사진이 담긴 피켓을 들고 기자들 앞에 서자 이종란 공인노무사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피켓을 다시 한 번 봐 주시겠어요? 이 자리는 이 분들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이 노무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황유미와 함께 걷는 봄, 희망을 피우다’가 6일 오전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앞에서 열렸다. 이날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11주기다. 황씨는 2003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기흥공장에서 1년6개월 정도 일했다. 2007년 3월6일 스물세 살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숨졌다. 경칩이던 이날 서울 낮 기온은 9도 안팎까지 올랐다. 한 참석자는 “황유미씨가 ‘과연 희망의 봄은 왔는가’ 하고 묻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은 “반올림이 활동한 지난 11년 동안 여러 성과도 있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쌓여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종란 노무사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삼성 본관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882일에 이르는 동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는 “노동자들이 병에 걸려 죽는 동안 안전보건공단·환경부는 무엇을 했느냐”며 “삼성을 제대로 감시하지 않은 고위공직자들도 각성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2015년 7월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조정권고안을 발표했지만 핵심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조정권고안에는 공익법인을 통한 피해자 보상안을 담았지만 삼성전자는 권고안 수용을 거부하고 자체 보상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듬해 1월 삼성전자·반올림·가족대책위가 가까스로 합의해 마련한 조정합의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조정합의서에는 외부전문가가 참여하는 옴부즈맨위원회를 설치해 사업장 유해인자를 관리하고 역학조사를 하는 내용이 담겼다. 옴부즈맨위는 출범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보고서를 내놓지 않았다. 이종란 공인노무사는 “올해 3~4월께 옴부즈맨위가 첫 연구보고서를 낼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방진복을 입고 서울고등법원을 거쳐 서울 강남구 반올림 농성장까지 도보로 행진했다. 오후 7시부터는 농성장에서 문화제를 열었다.

반올림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삼성계열사에서 일하다 병에 걸렸다고 반올림에 제보한 피해자는 320명이다. 이 중 118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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