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연휴 동안 영화 두 편을 몰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는 20세기 초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린 <천사의 투쟁>이고, 또 하나는 1960년대 흑인 참정권 운동을 그린 <셀마>다. 20세기 정치적 시민권을 보장받기 위해 싸웠던 여성·흑인의 투쟁과 당대의 정치적 모순을 그린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나니, 우리 사회 현실과 여러모로 겹쳐진 느낌이었다.

앞의 영화는 앨리스 폴 등 전미여성참정권협회 워싱턴지부 활동가들이 여성의 선거권을 미국 수정헌법에 포함시키기 위해 윌슨 정부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렸다. 협회 지도부는 민주당과 대립하지 않으려 하고, 헌법수정 요구는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며 이들의 투쟁을 통제하려 하지만 이들은 시가행진을 조직하고 백악관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는 등 윌슨 대통령을 직접 압박했다. 윌슨은 여성 선거권 보장에 관해 “좀 더 기다려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에 맞서 여성 활동가들이 들어 올린 피켓에 등장한 구호는 “대통령님, 여성은 언제까지 자유를 기다려야 하나요?”였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통령을 압박하는 이들의 시위가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고, 그럼에도 백악관 앞 시위를 계속하자 도로교통방해죄로 이들을 구금하고 노역장에 갇힌 이들이 단식농성을 이어 가자 강제급식을 실시하는 폭력적 장면이었다.

<셀마>는 1965년 흑인 민권운동이 흑인 투표권에 관한 극심한 탄압을 고발하고 관련 법 개정을 요구하며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조직했던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형식적으로는 흑인 투표권이 인정됐지만, 실제로는 선거권을 행사하는데 제도적·물리적 탄압이 만연해 있었다. 마틴 루터 킹은 케네디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과 대면해 흑인 투표권 보장에 관한 대통령의 지지를 호소하지만, 존슨 대통령은 시민권 법안을 지지한다면서도 의회 통과를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며 도리어 이들이 행진을 유보할 것을 요구한다. 행진 참여자에 대한 앨라배마주지사의 잔혹한 폭력행사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을 이어 가고, 마침내 시민권법을 쟁취한다.

윌슨과 존슨은 모두 개혁을 표방했던 대통령들이다. 이들은 시민권 확대를 지지하는 유명한 연설을 내놓았지만 이를 실제로 법·제도로 보장하라는 운동단체의 요구에 대해서는 “아직은 시기상조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는 태도를 고집했다. 대통령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 투쟁을 조직하려는 이들에 대해서는 심지어 진보진영 내부에서조차 온갖 핍박이 쏟아졌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동안 ‘노동존중 사회 실현’을 비롯한 이전에 듣기 어려웠던 ‘약속’을 쏟아 냈고, 역대 최고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다. 대통령은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등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교사·공무원의 노동기본권 보장 등 많은 장밋빛 약속을 내놓았지만, 출범 1년이 지난 현재 노조할 권리 보장과 관련한 어떠한 진전도 이뤄진 바 없다.

더욱 우려스려운 것은 노동기본권 보장과 관련한 실제적 로드맵조차 마련돼 있지 않고, 심지어 정권의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징후마저 엿보인다는 점이다. 올해 초 고용노동부 업무계획에서도 노동기본권 보장 과제는 빠졌으며, 드라마틱하게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간판을 바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의제에서도 노동기본권 보장은 한참 후순위로 밀려나 있다. 이번 노동절 대통령 축사에도 노동자에 대한 위로 이상의 구체적 추진계획은 담기지 않았고, 지방선거를 앞둔 여당의 공약에서도 실종돼 있다.

1년 전, “1년만 대통령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던 문재인 정부는 이제 6·13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달라는 식이다. 두 편의 영화를 보는 내내 대통령의 ‘약속’만 믿고 기다려서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상념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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