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다야 라이 이주노동자노조 위원장. <정기훈 기자>

지난 21일 오후 서울 은평구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2층에 위치한 이주노동자노조 사무실. 박진우(32) 노조 사무차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온다.

“아유~ 반바지 입은 걸 보니 벌써 여름이네.”

인기척이 들리자 컴퓨터와 낮은 칸막이 사이로 얼굴을 맞대고 앉은 셔틀버스노조 간부가 알은체를 한다. 박진우 차장이 덥다는 듯 손부채질을 하며 씨익 웃었다.

노조는 서울본부 사무처를 비롯해 네댓 노조와 한 사무실을 쓰고 있다. 낮은 칸막이로 구획을 나눠 놓긴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기만 해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박 차장은 "다른 노조와 이웃처럼 지낸다"고 너스레를 떤다. 노조는 셔틀버스노조와 희망연대노조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셔틀버스노조 너머 앞쪽으로는 서울일반노조가 있다.

박 차장은 “같은 사무실을 써서 불편한 것은 없다”며 “맨땅에 헤딩하듯 처음 노조활동을 시작했을 때 주위 노조 활동가들에게 집회신고 방법 등 노하우를 전수받았다”고 말했다.

“하루 평균 20건 전화상담, 사업장 변경 문의 가장 많아”

같은 시각 우다야 라이(50) 위원장은 휴대전화로 조합원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낯선 외국말이 새어 나왔다. 네팔어라고 했다. 몇 분간 이어진 상담이 끝난 뒤 라이 위원장은 또다시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그는 연이어 전화 통화를 한 뒤 말했다.

“조합원이 아파서 하루 못 나갔더니 사업주가 이탈신고를 해 버렸다는 거예요. 조합원이 고용노동부에 가서 연락하면 나도 곧 따라가겠다고 했어요.”

라이 위원장은 하루 평균 20건, 많을 때는 30~40건씩 전화로 상담을 한다. 사건이 밤낮없이 터지는 탓에 라이 위원장도 밤낮없이 대기 상태다. 사업장 변경에 관한 문의가 가장 많다. 임금체불·퇴직금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라이 위원장은 “방금 한 상담도 고용허가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네팔 출신인 라이 위원장은 지금은 없어진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1998년 한국에 왔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직장 동료에게 폭행을 당한 적이 있어요. 대응해 봤자 도와줄 사람도 없고 불리할 것 같아서 신고하지 않고 피해 버렸죠. 한국에는 돈은 없고(적게 받고) 차별만 있었어요.”

라이 위원장은 지금도 1주일에 한두 건 정도 폭력피해 상담전화를 받는다. 20일에도 인천에서 사업주에게 맞아 병원에 가는 중이라는 조합원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은 했지만,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며 안타까워했다.

라이 위원장은 노조 5대 위원장이다. 2012년 고국 필리핀으로 잠시 돌아간 미셸 카투이라 전 위원장이 한국 입국을 거부당하면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2014년 10월 위원장에 선출됐다. 역대 노조위원장 4명 중 3명은 강제출국을 당했다.

조합원 500여명에 한국인 상근자 두 명

라이 위원장 왼쪽에 박진우 사무차장이 앉았다. 다음달에 열리는 노동 관련 포럼 참여일정을 조율하고, 이주노동자 관련 기고글을 구상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노조 상근자 3명 중 2명이 한국인이다. 조합원이나 선출직 간부는 모두 이주노동자 혹은 이주노동자 출신이다. 집회신고를 하거나 회의에 참석할 때 한국인 활동가가 필요하다.

박진우 이주노동자노조 사무차장. <정기훈 기자>

박 차장은 실무·행정·대외협력 업무를 맡고 있다. 노조에서 일한 지 7년째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인 스물일곱 살에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이곳이 첫 직장이다. 박 차장은 대학생 때 이주노동자 한글교실에서 활동하며 노조와 연을 맺었다. 졸업 뒤 사회에 나가면 어떤 활동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2012년 위원장 공백으로 노조에 위기가 찾아온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비대위원장으로 선출된 라이 위원장과 함께 노조활동에 발을 내디뎠다.

“잘 몰라서 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데서 경험했다면, (현실을) 알았다면, 차마 한다고 못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무모해 보이니까요.”

박 차장 왼쪽 자리 주인은 이율도(33) 교육선전국장이다. 이 국장은 지난해 11월 노조에 합류했다. 이 국장은 네팔에서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 1년간 일한 적이 있다. 한국에 가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던 네팔 청년들을 가르쳤다. 한국에 와서도 그때 이주노동자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지내다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개인적으로 모임을 갖고 상담을 했다. 그러면서 노조를 알았고, 자연스레 몸담게 됐다.

합법화 3년, 조합원 늘었지만 누적되진 않아

노조는 올해로 합법화한 지 만 3년이 됐다. 2005년 4월24일 설립했지만 5월에 제출한 설립신고서를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이 반려했다. 같은해 6월 설립신고서 반려처분취소 소송을 냈다. 1심에서 졌고, 2심에서 이겼다. 2007년 2월 서울노동청 상고로 사건은 8년간 대법원에 계류됐다. 2015년 6월 최종 승소했다. 합법노조가 된 것이다.

노조는 합법화 3년간 조직화에 매진했다. 라이 위원장은 "상담활동과 유인물 배포, 선전전에 힘을 쏟고 있다"며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돕고 조직화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효과는 있었다. 노조설립 전 조합비를 내고 활동하던 조합원이 100명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500여명으로 늘었다.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조합원도 증가했다. 노조는 “이주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기간이 4년10개월로 정해져 있다 보니 가입자가 누적되진 않는다”며 “가입했다가 본국에 돌아간 사람까지 합치면 조합원이 훨씬 늘어난다”고 전했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외국인고용법)에 의하면 외국인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가능 횟수는 3년간 3회를 초과할 수 없다. 3년 기간이 만료된 노동자는 추가로 1년10개월을 더 일할 수 있는데, 사용자가 재고용을 요청한 경우로 제한된다. 사용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조 산하 지부는 8개다. 지부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부산 이주노동자는 경기도권 가장 남쪽에 있는 평택지부에 가입한다.

"투투버스로 목격한 열악한 노동현장"

노조는 지난달 투쟁투어버스(투투버스)를 타고 이주노동자 사업장을 찾아다녔다. 지역 사업장에서 쉴 시간 없이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 달간의 투투버스 운행기간 동안 노조 상근자들은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업주는 '외국인근로자 숙식정보 제공 및 비용징수 관련 업무지침'을 적용해 임금에서 숙식비를 공제했다. 컨테이너 수준의 가건물을 거주지로 제공했다. 업무지침에 따르면 사업주가 이주노동자에게 숙소·식사를 제공하고 서면동의 절차를 거치면 임금에서 숙식비를 공제할 수 있다.

박 차장은 목격담을 쏟아 내듯 증언했다.

“사람이 살면 안 되는 곳을 거주지로 주는 회사가 많았어요. 컨테이너 안에서 평균 네 명씩 먹고 자고, 같은 나라라고 남녀를 혼숙시키는 사례도 있습니다. 안전시설은 엉망이죠. 감전이 우려돼 문고리를 고무장갑으로 감싼 곳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어 야외에 삽을 파고 화장실 대신 사용하는 모습도 봤어요.”

라이 위원장은 "사업주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개선대책을 내놓아도 실효성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노조는 자유로운 사업장 변경 허용과 숙식비 지침 폐기 활동에 주력할 예정이다.

“진짜 어렵고 억울한 이주노동자들이 많은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때가 힘들어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박진우 차장이 바람을 전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이주노조 합법화 쟁취, 투투버스 운행이 대표적이죠. 이주노동자들은 추방까지 각오하면서 운동을 합니다. 그들이 좀 더 안정된 조건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율도 국장이 말을 이었다.

“이주노동자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사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열심히 조합원을 만나야죠.”

 

서울 은평구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2층에 위치한 이주노동자노조 사무실.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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