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노동 시대가 1일 열렸다. 올해 2월 국회에서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3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부터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가 적용된다.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 개선과 일자리 창출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노동시간단축 근기법 개정 취지는 얼마나 달성할 수 있을까.

현장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 목소리가 높다. 재계가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정부가 시혜적인 땜질식 처방을 남발한 탓이다. 노동현장 연착륙을 명목으로 장시간 노동을 그대로 두는 조치가 더해지면서 노동시간 단축효과를 무력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노동시간 줄인다고? 노동시간 정상화

주 52시간 시행은 엄밀히 말하면 노동시간을 줄이는 게 아니다. 노동시간 정상화다. 1주를 5일이라고 본 고용노동부의 잘못된 행정해석 때문에 최대 68시간까지 가능했던 초장시간 노동 관행을 현행법대로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뿐이다.

노동시간단축 합의 역사는 숙성돼 있다. 노사정은 2010년 6월 '장시간 근로 관행 개선과 근로문화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채택해 2020년 전까지 연평균 노동시간을 1천800시간대로 단축하기로 합의했다. 2012년에는 실근로시간단축위원회를 구성했다. 지난 19대 국회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주 52시간제를 담은 근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수년 전부터 노동시간단축 시그널이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던 셈이다. 김영주 노동부 장관이 그동안 "대기업들은 이미 충분히 준비돼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던 이유다. 김 장관은 지난달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자브리핑에서 "노동시간단축 논의는 19대 국회 때부터 했고, 주 52시간만큼은 여야가 합의한 상태였다"며 "근기법 개정안이 올해 2월 타결됐을 뿐이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시간 정상화에 브레이크를 거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겨냥한 발언으로 보인다. 경제부처와 여당의 이상한 움직임은 재계가 "준비가 부족하다"고 떼를 쓰면서 시작했다. 보수언론은 "근로시간단축은 재앙"이라며 재계 주장에 힘을 실었다.

재계 소원수리 들어준 당·정·청

한국경총이 지난달 19일 노동부에 근로시간 시행 계도기간 연장과 인가연장근로 허용범위 확대,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를 요구했다.

재계 숙원은 하나씩 해결됐다. 지난달 20일 고위당정청회의에서 6개월 계도기간과 처벌유예 결정을 내렸다. 김동연 부총리는 같은달 26일 경제현안간담회에서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와 '인가연장근로 허용범위 확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홍영표 원내대표는 27일과 28일 연이틀 기업인들과 간담회를 갖고 "탄력적 근로시간 단위기간을 6개월로 연장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일이 많을 때 많이 일하고, 없을 때 적게 일해 평균 노동시간을 주당 52시간에 맞추는 제도다. 지금은 노동자대표와 서면합의로 최장 3개월 동안 탄력근로제를 운영할 수 있는데, 단위기간을 6개월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단위기간 6개월 동안 노동자들은 연장근로를 해도 연장근로수당을 받지 못한다.

인가연장근로는 자연재해와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재난안전법)에 따른 재난 또는 이에 준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지극히 제한적인 사유로만 사용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특별연장근로 인가는 기업이 사업장에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노동부 장관 인가와 노동자 동의를 받아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특별한 사정은 재난안전법상 자연재해 및 화재·붕괴·폭발·교통사고·화생방사고·환경오염사고·에너지·통신·교통·금융·의료·수도 등 국가기반체계 마비 같은 사회재난 사유를 의미한다.

그런데 김동연 부총리가 "특별연장근로를 인가받아 활용할 수 있는 구체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히면서 범위가 대폭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다. 같은날 노동부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활용기업은 전체 3.4%에 불과하다"며 유연근로시간제 가이드를 발표했다.

유연근로제는 법령에 있는 제도이긴 하지만 노동강도 강화나 연장근로수당 삭감 같은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회장인 박성우 공인노무사는 "유연근무제가 좋은 제도가 아니라서 활용 기업이 적었던 것"이라며 "마치 대단한 대안인 양 정부가 나서 홍보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 친기업 노선 우향우?

장시간 노동 개선이라는 애초 근기법 개정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정부가 친기업 노선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300인 이상 대기업과 공공기관까지 유예기간을 두겠다는 것은 정부가 노동시간단축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며 "대기업도 수용하기 힘든데 중소기업은 어떻게 하겠냐는 프레임이 고착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 소장은 "장시간 노동으로는 더 이상 경제성장이나 혁신경제를 이룰 수 없다는 자기 철학을 가지고 정부가 정공법을 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성우 노무사는 "정부가 보여 주는 태도는 현장에 '법만 잘 활용하면 인력채용 없이도 처벌을 피해 갈 수 있다'는 좋지 않은 시그널을 준다"며 "노동시간을 줄일 의지가 있다면 일자리 창출 대안 마련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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