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우람 기자
노동자들이 든 노란색 손피켓에 큼직한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1998'에서 '2017'까지, 숫자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커졌다. 숫자 위엔 작은 글씨로 '파견법 20년=소모품 20년'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2018에서 왼쪽 숫자를 빼면 각 노동자들이 몇 년을 노동시장에서 소모품으로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법원 확정 판결로 일부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됐지만 극소수다.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노동자들은 “파견법이 파견근로자를 보호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며 “노동자들을 쓰다 버리는 소모품으로 전락시킨 파견법을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적 약자·저임금 노동자 양산법"=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은 1998년 7월1일 시행됐다.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파견법 시행 20년을 맞은 2일 정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동자들은 입사연도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부초처럼 흔들리는 파견인생을 풀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98년 SK에너지 하청회사 인사이트코리아(파견업체)에 입사한 김인선씨의 말이다.

“원청인 SK 소속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고용이 유연하고 저임금을 줘도 되니까 SK가 파견업체를 통해 사람을 뽑았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저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 지금은 정규직으로 일합니다. 여러 동지들의 도움을 받았죠. 주변을 보면 아직도 계약에 재계약을 한 뒤 다른 업체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요. 파견법은 누구를 보호하는 법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회적 약자와 저임금 노동자를 양산하는 법이에요.”

코스콤의 공인인증서 시스템을 운영하는 업무를 했던 정인열씨는 2000년 10월 코스콤 하청회사에 입사했다. 파견노동자로 7년을 살았다. 지금은 퇴사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일했고, 원청 지시도 같이 받았어요. 면접도 코스콤이 봤습니다. 심지어 명함도 같았죠.”

기륭전자 하청업체 휴먼닷컴에서 일했던 김소연씨는 '2002'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었다. “파견노동자 동창회에 온 것 같다”고 운을 뗐다.

“2002년 기륭전자가 휴먼닷컴을 통해 구로공단에서 처음으로 파견노동자를 고용했어요. 3년을 일했습니다. 주말에 쉬고 오면 해고되고, 너무 심했어요. 2005년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륭전자가 하청업체를 다 바꾸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했어요. 10여년 싸우는 동안 파견법은 고용의제에서 고용의무로 개악됐을 뿐이에요. 외환위기는 3년 만에 졸업했지만 외환위기를 이유로 도입된 파견법은 20년 동안 노동자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를 거리로 내모는 파견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

◇"파견법·기간제법, 비정규직 양산 못 막아"=기아자동차 화성공장 하청업체에 2003년 4월 입사한 김수억씨는 “파견법이 제정됐을 때 비정규직 보호법이라고 했는데 20대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제가 40대가 된 지금도 비정규직”이라며 “20년이 지난 지금 저희가 알고 있는 것은 현재의 파견법과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로는 비정규직 양산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대우자동차 공장에서 4년간 파견노동자로 일했던 이용우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는 “파견법 입법목적에 파견노동자 고용안정·복지증진, 원활한 인력수급 두 가지를 명시하고 있지만 앞선 노동자들의 증언처럼 두 가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지난 20년의 경험”이라며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방안은 사용자를 원청과 하청으로 구분하는 것을 금지하고 직접고용으로 일원화하는 것”이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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