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올림

 

“돈 없고 힘 없고 가난한 노동자라 해서 작업현장에서 화학약품에 의해 병들고 죽어 간 노동자(문제)를 10년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이제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발언 도중 말을 잠시 멈췄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르듯 말을 잇더니, 결국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딸 황유미씨를 2007년 3월 급성백혈병으로 떠나보낸 뒤 11년 만에야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2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수용한다는 내용의 중재합의서에 서명했다. 조정위는 반올림을 비롯한 피해자쪽과 삼성전자 합의로 2014년 12월 출범했다. 김지형 전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았다. 그런데 이듬해 7월 조정위가 조정안을 내놓자 삼성전자는 태도를 바꿨다. 공익법인을 설립해 피해보상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자체 보상위원회를 만들었다. 조정위는 멈췄고, 반올림은 삼성전자 앞 농성에 들어갔다.

중재합의서 서명에 따라 조정위 활동이 재개됐다. 이날 서명식에는 김선식 삼성전자 전무와 황상기 반올림 대표·김지형 조정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조정위 “전문가 자문받아 중재안 만들겠다”

조정위는 이날 서명 이후 곧바로 중재안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9월 말이나 10월 초 중재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중재안에 따라 10월 중 반올림 내 피해자 보상을 마칠 예정이다. 중재안에는 보상 대상 질병을 비롯한 피해자 보상안과 삼성전자측 사과, 재발방지와 사회공헌 방안 등이 담길 전망이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중재안에는 반올림 피해자뿐만 아니라 산업안전보건 문제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직업병 발병 위험에 실효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을 담을 것”이라며 “지원·보상의 새로운 기준이나 방안을 수립하는 데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중재안을 만들어 내겠다”고 밝혔다.

조정위는 산하에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위원회를 만들고, 자문위원 자문을 받아 중재안을 도출할 계획이다. 중재안 마련 과정과 개별 지원·보상 내역은 비공개하기로 했다. 최종 중재결정·합의서명식은 공개한다. 이날 김지형 위원장은 “조정위원회를 믿고 백지신탁에 가까운 중재방식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삼성전자와 반올림에 감사드린다”며 “무거운 책임과 소명감을 가지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중재안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늦었지만 다행, 다시는 이런 일 없어야”

반올림

이날 황상기 대표는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는 “유미가 2005년 삼성반도체 공장을 다니다 급성골수성 백혈병에 걸렸을 적에 너무나도 큰 낙심과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며 “이야기를 듣고 기사로 다뤄 준 기자들, 삼성직업병 피해자·상임활동가·단체들 모두 고맙다”고 전했다. 황 대표는 “노동현장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올림과 삼성은 모두 조정위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공유정옥 반올림 간사는 “조정위가 미래지향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올림은 조정 재개나 직접 대화를 요구해 왔지만, 삼성전자는 문제가 해결됐다고 여러 번 선포했기 때문에 조정위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며 “회사가 입장을 선회한 것은 큰 결정이라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김선식 삼성전자 전무는 “조정위가 제안한 대로 타협과 양보의 정신에 입각해 가장 합리적인 중재안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며 “조정위의 향후 일정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

반올림은 삼성 서초사옥 앞 천막농성장을 25일 저녁 ‘농성 해단 문화제’를 끝으로 철수한다. 2015년 10월7일 농성을 시작한 지 1천23일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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