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4월27일자 매일노동뉴스의 노회찬 전 정의당 공동대표 인터뷰.<정기훈 기자>

“신문을 창간할 당시 나중에 경영이 어려워져도 매일 나올 수 있도록 ‘매일’이라는 글자를 꼭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매일노동뉴스가 나무에서 숲이 되기까지 많은 관계자와 독자의 애정이 있었다.”

2009년 1월5일 매일노동뉴스 지령 4천호 기념식 및 <현장을 가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당시 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의 말이다. 매일노동뉴스는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지난 23일 타계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진보노동언론 매일노동뉴스의 초대 발행인이자 대표였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매일노동뉴스를 이끌었다.

고인이 아꼈던 이력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노회찬 대표는 매일노동뉴스를 떠나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언론인터뷰나 방송프로그램에 나갈 때 자신의 프로필 3개 안에 꼭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넣었습니다. 그만큼 매일노동뉴스를 아끼는 마음이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 의원이 타계한 지난 23일 저녁, 빈소가 마련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노회찬 매일노동뉴스 대표시절 직원들 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고인이 매일노동뉴스를 아끼는 마음이 컸던 만큼 지난 27일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열리는 국회로 가는 길에 고인의 운구차량이 매일노동뉴스 사옥에 잠시 들르도록 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국회장으로 진행되는 제약으로 성사되지는 않았으나 노회찬 의원과 매일노동뉴스 거리는 멀지 않았다. 영결식에서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은 영결식 공식 안내책자에는 나오지 않은 매일노동뉴스 초대 발행인 이력을 별도로 소개했다.
 

2012년 5월18일 매일노동뉴스 스무 번째 생일맞이, 전현직 임직원 방담회.<정기훈 기자>

“모두가 반대했지만…” 매일노동뉴스 탄생기

매일노동뉴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매일노동뉴스 역사를 꿰고 있는 초대 멤버들의 기억을 소환했다.

“제가 처음 제안했습니다. 92년이었는데요. 당시 보수지는 민주노조운동 정보를 전혀 유통시키지 않았지요. 그래서 노동뉴스 스크랩, 노조의 성명과 자료를 천리안 같은 PC통신에 올리고 있었는데요. 일간지를 만들자고 생각하게 됐죠.”

초대 편집국장을 맡은 김태균 노사발전재단 HR컨설팅팀 부장 회고다. 당시 김 부장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노동국장이었다. 진정추는 노동지원단체의 업그레이드를 고민하던 차였다.

“진정추 안에서 반대가 엄청 심했죠. 현실적으로 일간지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돈과 사람이 필요한지 아느냐고요. 그냥 PC통신에 올리는 방식을 유지하자고요. 하지만 저는 청와대와 노동부, 기업에 정보가 유통되려면 인쇄매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그때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노회찬 의원이다. 당시 노 의원은 진정추 조직위원장이었다. “93년 초 노 의원과 한 인쇄소 사장을 같이 만났어요. 그때 노 의원이 가능성을 보고 해 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진정추 지역 지부장들이 지국장으로 나서 줬죠.”

매일노동뉴스가 지면으로 발간된 시점은 93년 5월18일이다. 이전에 PC통신에 올린 것이 150여회 나온 뒤였다. 노 의원이 기꺼이 초대 발행인이자 대표를 맡았다.

진정추가 일간지 창간에 반대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매일노동뉴스 출발은 어려움 그 자체였다. 노회찬 당시 대표와 직원, 지국장들의 헌신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을 인쇄하면 고속버스에 실어 보냈고 새벽에 지국장들이 터미널에서 받아 직접 배달했다. 조승수 전 의원도 매일노동뉴스를 배달하던 지국장 중 한 명이었다.

매일노동뉴스가 일간지로서 제대로 꼴을 갖춘 시기가 94~95년이다. 이때 이정희·차유미·라효윤·황보연 기자가 채용됐다. 진숙경 기자는 초기부터 합류했다.
 

2010년 3월10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통합 논의를 위해 국회에서 만나 인사말을 나눈 뒤 스마트폰으로 서로를 촬영하고 있다.<정기훈 기자>

헌신을 먹고 노동일간지로 자리매김

차유미 전 기자는 “그때 양대 노총, 노동부, 경총에 취재하러 다니면서 고생들 많이 했다”며 “그렇게 열심히 출입한 지 6개월 정도 되니까 사람들이 알아주더라”고 기억했다. 매일노동뉴스는 97년부터 한겨레 전국 배달망을 타고 배달됐다.

매일노동뉴스가 제대로 주목을 받은 시점은 창간 5주년 및 지령 1천500호가 나오던 시점이다. 98년 5월이었다. 이때 취재기자 5명이 모두 여성이어서 더욱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겨레·시사저널·여성신문 등 다수 매체가 이 소식을 다뤘다. 창간 초에 1년 이상 버틸 수 있겠느냐고 했던 매일노동뉴스였다.

당시 노회찬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80년대 노동운동 현장에서 헌신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세 속에서 노사관계 발전에 기여하고자 만든 것이 매일노동뉴스”라며 “그 운동의 정신과 열정이 없었다면 오늘은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노사문제 해결의 관건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라며 “기업주는 노동자를 생산의 도구로만 여길 게 아니라 동반자로서 협력을 요청하면 합리적 대안을 찾는 게 어렵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당시 노 의원와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여전히 그들은 의원이나 원내대표 대신 대표라고 표현했다.

“저는 그때부터 이미 촌철살인의 상징 노 대표를 알아봤습니다. 평소엔 근엄하고 내성적으로 보였는데 술자리에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구라쟁이’라고 생각했지요.”

매일노동뉴스 기자 출신으로 <정도전> <어셈블리>를 쓴 정현민 드라마 작가의 말이다. 정 작자는 “세상에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은 많지만 재미와 더불어 진심을 담는 재담가는 드물다”며 “그래서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진보정치를 친근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2010년 7월23일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서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단식농성장을 찾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에게 앉을 것을 권하고 있다.<정기훈 기자>

탁월한 식견의 언론인이자 집에서는 밥 짓는 남편

“노 대표는 언론인으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2002년 발전노조 파업 당시 노 대표가 잠깐 데스크를 맡은 적 있는데 그때 뽑은 제목이 뇌리에 생생합니다.”

편집국장이 없던 때였다. 당시 편집부장이었던 노현기 파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는 자신이 당황할 때 노 대표가 데스크로 나서 활약했던 이야기를 회고했다. 당시 기사제목은 “민주노총, 시계(視界) 제로”였다.

“민주노총이 발전노조 파업과 관련한 노정합의서를 전면 폐기하기로 했으며 총연맹 임원진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하기로 했다. 이로써 노정합의서 문제로 촉발된 민주노총의 위기가 극심한 안개정국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기사의 리드다.

노현기 공동대표는 “사실 제가 제목을 뽑으려고 할 때 그렇게 과감하지 못했는데 노회찬 대표는 거침없었다”며 “그때 민주노총 사람들도 시원한 제목이라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노현기 공동대표는 노회찬 대표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다.

“제가 집이 멀어서 밤늦게 끝나면 노 대표 집에서 잘 때가 있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면 노 대표는 (아내인) 지선 언니랑 항상 아침밥을 같이했어요. 아주 익숙하게, 맛도 좋았죠.”
 

2011년 8월11일 노회찬·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단식농성 30일 만에 건강악화와 각계의 요청으로 단식농성을 중단했다. 심상정 의원은 지난 27일 노회찬 의원 영결식 조사에서 이때 상황을 회상하면서 “2011년 대한문 앞에서 함께 단식농성하며 약속했던 그 말, ‘함께 진보정치의 끝을 보자’던 그 약속, 꼭 지켜낼 것입니다”고 다짐했다.<연윤정 기자>

외롭고 해맑은, 그러나 늘 미안해하던 사용자

당시 편집기자로 일한 정하연 프리랜서 북디자이너는 노 대표의 외로운 면모와 해맑은 모습을 동시에 기억해 냈다. 정 디자이너는 “그때 노 대표님을 어려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저도 그랬다”며 “점심시간이 되면 직원들이 같이 식사하러 가자는 말도 잘 못했다”고 전했다.

“저는 같이 식사한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같이 식사하자는 말에 기뻐하며) 노 대표님이 맛있는 밥집을 안다며 홍대 정문까지 걸어갔는데 그 밥집이 문을 닫았더군요. 결국 다른 식당을 찾아갔지만 그때 미안해하면서도 해맑게 웃던 노 대표님 얼굴이 생각납니다.”

당시 경영부서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노 대표가 매일노동뉴스를 운영하느라 항상 빚에 쪼들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재정적으로 어려워 월급을 제때 못 주는 때가 많았다”며 “항상 빚에 쪼들렸고 결과적으로 큰 뜻을 가진 분에게 넘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노 대표는 항상 함께 고생했던 직원들을 생각했다”며 “주식회사로 전환되던 때 초창기 기꺼이 배달을 맡아 줬던 진정추 동지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기자의 기억도 소환하고자 한다. 어렵지 않았던 때가 있었겠냐마는 매일노동뉴스가 가장 어려웠던 때인 2002~2003년 선배들이 떠나고 기자가 ‘최고참’으로 남았던 그때, 기자와 노 대표는 노조위원장과 사용자로서 마주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후배들을 이끌고 노 대표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민주노동당사를 쳐들어갔던 때 노 대표 표정이 생생하다. 그는 사용자로서 늘 미안해하던 사람이었다. 그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2012년 11월1일 전태일재단이 주최한 서울 청계천 6가 전태일다리 명명식에 노회찬 진보정의당 의원이 참석했다. 노 의원은 전태일 열사가 모셔져 있는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었다.<서울시>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늘 매일노동뉴스와 함께합니다”

매일노동뉴스에서 노회찬 의원이 언급된 기사는 대략 1천200건 정도다. 2000년 이전 홈페이지에 업데이트되지 못한 기사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매일노동뉴스를 통해서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이자 진보정치인으로서의 길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노 의원은 매일노동뉴스를 떠난 뒤에도 매일노동뉴스 주요 행사에 꼭 참석했다. 그가 재직했을 때와 떠난 뒤 매일노동뉴스 기사에 남은 그의 발언을 추려 봤다.

“노사관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면서 매일노동뉴스 창간 8주년을 축하하고 관심을 보내 준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앞으로 매일노동뉴스는 ‘민주주의의 진전’이란 시대적 과제를 진전시키는 데 매진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분명히 해 나갈 것이다.”(2001년 6월8일 창간 8주년 기념식)

“진보진영 전체의 기관지 역할도 해 달라.”(2006년 3월17일 황원래 전 발행인 취임식)

“당시 노동전문일간지를 하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주간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일간지를 냈다. 전 세계 최초였다. 최근까지 발행이 중단되는 일 없이 20년이 됐다. 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창간 초기 우격다짐으로 10년간 발행인을 맡은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2012년 3월23일 인터뷰)

“초창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매일노동뉴스를 이끈 사람들의 열정과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매일노동뉴스도 없었을 것이다. 매일노동뉴스를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몸만 떠났을 뿐 마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 매일노동뉴스가 더 큰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진다. 나도 있는 힘, 없는 힘 다해서 돕겠다.”(2012년 5월18일 전·현직 임직원 방담회)
 

2015년 1월15일 서울 마포구 한 음식점에서 열린 ‘매일노동뉴스 신년회’에 노회찬 전 매일노동뉴스 대표, 박승흡 매일노동뉴스 회장, 박성국 당시 매일노동뉴스 대표가 인사하고 있다.<연윤정 기자>

“당신의 노고, 의지, 꿈 잊지 않겠습니다”

모두가 1년은 버티겠냐고 했던 매일노동뉴스는 국내 유일 노동전문일간지로서 26년째 뛰고 있다. 그리고 후배들은 ‘100년 가는 노동언론’을 다짐하고 있다. 그것이 매일노동뉴스 초대 발행인이자 대표였던 노 의원의 뜻일 것이다.

매일노동뉴스는 고인의 영결식이 열린 27일자 신문에 고인을 애도하는 광고를 게재했다. 그의 후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매일노동뉴스를 만든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던, '10년간 매일노동뉴스를 경영하며 마신 소주가 3천병, 맥주는 1만병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다'던 노회찬 매일노동뉴스 초대 대표. 당신의 노고, 의지, 꿈 잊지 않겠습니다. 매일노동뉴스 임직원 일동”

1998년 5월 <사회평론 길>에 창간 5주년 및 지령 1천500호를 맞아 나온 기사.<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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