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 시인

노동문학이니 노동소설이니 하는 말을 철 지난 것쯤으로 여긴 지 오래됐다. 안재성의 <파업>이나 정화진의 <철강지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겠으나, 그 이후에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노동소설에 누구도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사정이 그렇게 된 데에는 소설가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소설은 시에 비해 당대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유효한 장르다. 하지만 대부분 소설가들이 문학성 혹은 예술성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당대 현실의 가장 첨예한 접점을 형성하고 있는 노동현장을 외면하다시피 했다.

그런 면에서 노동소설가 이인휘의 복귀는 기이하면서도 반갑기만 하다. 이인휘는 오랜 침묵을 깨고 2016년에 소설집 <폐허를 보다>에 이어 장편소설 <건너간다>를 펴내더니 이번에는 500쪽이 넘는 장편소설 <노동자의 이름으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동안의 공백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모습에 반가움을 표시하는 이가 나 하나만은 아닐 터다. 더구나 남들이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공장과 노동자 이야기를 여전히 붙들고 있어 더욱 미더움을 자아낸다. 작품의 성취 또한 만만치 않아서 가히 노동소설의 부활이라고 할 만하다.

<노동자의 이름으로>는 현대자동차 노조 투쟁 과정에서 분신한 양봉수 열사의 일대기를 기본 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양봉수라는 한 개인의 생애사에 머물지 않고 현대자동차 노조의 투쟁, 나아가 1980년대 후반 이후 노동운동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남한 사회 노동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런 만큼 각성된 노동자들의 투쟁을 꺾기 위한 정부와 자본가의 탄압은 집요했고, 회유와 협박은 물론 테러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배신과 야합도 속출했다. 소설 속에는 이러한 모든 과정이 날것으로 생생하게 담겨 있다.

양봉수와 더불어 소설 속 또 다른 주인공인 김광주가 노동조합에 무관심해진 건 위원장을 비롯한 어용세력들의 비열한 행태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광주가 새로 입사한 청년노동자 양봉수를 만나고, 양봉수가 열혈 활동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그러다 양봉수가 분신을 하게 되고, 이후 김광주는 양봉수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민주노조 재건 운동에 과감히 뛰어든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벌일 때 사수대장을 맡았던 김광주는 결국 구속을 당하고, 석방 후에도 노동운동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현실의 삶은 만만치 않아서 그를 외딴 섬으로 흘러가 숨어 살게 만든다. 그런 김광주를 다시 뭍으로 이끈 건 그의 아들이다. 비정규 노동자로 일하며, 차별의 벽을 깨부수기 위해 고속도로 난간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아들. 지금 이 시대의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이만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따로 있을까?

아들이 있는 고공농성장을 찾아 나선 김광주의 가슴에 쌓인 회한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척이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라 300일이 넘도록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파인텍 노동자들, 벌써 30명째 목숨을 끊었는데도 아직 공장으로 돌아가고 있지 못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이 겹쳐지기에 더욱 그렇다.

이인휘의 소설 <노동자의 이름으로>는 생동감 있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어 두께에 비해 빠르게 읽히지만 그냥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이 땅 노동자들에게 노동운동의 투쟁사를 전하는 보고서이자 연대의 절박함을 일깨우는 호소문이다. 다른 이름이 아닌 노동자, 이 땅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억눌린 삶을 강요당하는 바로 그 노동자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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