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한가위를 며칠 앞두고 백기완 선생님을 찾아 뵀습니다. 어언 여든 중반, 연세도 연세려니와 지난여름 심장동맥 여러 개를 이식하는 큰 수술을 하시고, 아직도 회복이 덜 되신 탓으로 몹시 힘들어 보였으나 기개는 여전하셨습니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 중이어서 화제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가곤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70년 분단을 끝장내고 한반도에서 모든 적대행위와 군사행동을 중단하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돼! 만판을 열어야 해. 우리 한반도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전 세계가 평화로 넘실대는 한바탕, 만판을 말이야.”

박정희·전두환의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힘들게 살아오셨으나 그 패거리들에 의해 조성된 분단의 고착화에 늘 분통을 터트리시던 선생님께서 온 민중이 함께 들었던 촛불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모습을 보시며 감개가 남달랐던가 봅니다.

“이 위원장, 내 고향 황해도 은률은 말이야 여기서 평택거리밖에 안 돼. 아, 거기 남으셨던 한 분 누이마저 몇 년 전 돌아가셨다니 나는 이제 돌아갈 고향마저 잃었어. 한가위면 모두들 고향 간다고 난리들인데 난 이제 끝났나 봐.”

언제 어디서나 그침 없이 쩌렁쩌렁 말씀하시는 천하의 백기완도 두 눈자위가 촉촉이 젖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동요 중에 으뜸이라며 <반달>을 목청껏 부르십니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햇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올 때/ 치마끈에 달랑달랑 달아 줬으면”

선생님 어릴 때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면 언제나 무릎에 앉히고 옛날얘기를 무궁무진 들려주시고 그 이야기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잠들면 가만히 내려다보시던 그 할머니, 어머니가 몹시도 보고 싶었나 봅니다.

“우선 금강산에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를 마련한다니 몇 년 안에 고향방문 길도 자유롭게 열리겠지요. 선생님,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셔서 그리운 고향산천이라도 다녀오셔야죠.”

속으로 조용히 나도 <반달>을 따라 불렀습니다.

지난봄과 여름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온 천지를 뒤덮고 하늘마저 가렸던 황사와 미세먼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찾아온 감당하기 힘든 폭염은 최저임금 인상마저 거부당한 우리 민중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시기의 사법농단이 드러났음에도 적폐청산을 거부하는 통에 탈취당한 전교조를 비롯한 다수 노동자의 노동기본권도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벌의 횡포에 막장으로 몰린 하청업체나 영세 자영업자들의 한숨이 분노로 바뀌고, 소외당한 농정의 무관심과 실패로 애먼 소농 노동자만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죽기도 힘들어 하늘로 쫓긴 해고노동자들은 굴뚝과 조명탑 위에서 한 맺힌 제사상을 준비하고 있고 단식으로 이어 가고 있는 곳곳의 농성장에는 스치는 바람만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주 절망만은 아닙니다. 못된 자본의 부당해고와 가공할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서 9년 동안 30명이나 목숨 바치며 싸워 온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의 끈질긴 투쟁이 승리를 거둬 부당해고자 전원복직의 성과를 이뤄 냈습니다. 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 여러 노동단체를 비롯한 종교단체와 시민단체 등의 연대투쟁으로 일궈 낸 값진 승리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아직 국가 차원의 손해배상을 취하하지 않는 등 남은 불씨가 있습니다만 국민의 감시 눈초리를 무시하지 않는 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평창 겨울올림픽 때 내려온 북쪽 예술단의 축하공연에 답하면서 남쪽 예술단이 평양에서 ‘봄이 온다’는 제목으로 공연을 했었지요. 한반도 평화의 봄을 기다리는 남북 인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 북쪽 예술단이 가을에 서울에 와서 공연하기로 약속하며 ‘가을이 왔다’로 하기로 했지요. 가을에는 꼭 평화의 열매를 맺으리라는 결의였습니다. 그 이후 김정은과 문재인이 세 번이나 만나면서 드디어 이번에 9·19 평양공동선언을 하게 됐습니다. 가을과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온 것이지요.

우리 노동자 민중에게도 이렇게 가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위가 내일모레인데 우리의 삶도 마음도 풍성해지고 ‘가을이 왔다’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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