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나영 기자
“방송사가 나오지 않아 논의는 ‘을’과 ‘병’들의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지난 5일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시간단축 방안을 논의하는 국회 토론회 자리에 방송사 관계자들이 불참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올해 초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방송업이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방송사들은 연장근로를 포함해 주 68시간 이상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는 내년 7월 적용된다. 사실상 ‘무제한 노동’을 하던 방송 스태프들은 노동시간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방송 제작현장 곳곳에선 “초장시간 노동 관행은 여전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부와 추혜선 정의당 의원·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비롯한 단체들이 주최한 ‘방송계 노동시간단축을 위한 토론회’는 이런 배경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시민·노동단체와 제작사·노동부·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한 노·사·정 관계자가 참석했다. 그런데 사용자에 해당하는 지상파 방송사 관계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김두영 지부장은 “논의가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특례업종 제외됐지만 초장시간 노동은 여전"

사용자들은 유연근로시간제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근기법 개정에 대비했다. 하루 20시간가량의 노동시간은 유지하면서 촬영 일수를 줄여서 주당 68시간 이내로 노동시간을 맞추는 식이다. 사용자들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스태프들의 노동 강도는 그대로다. 촬영 일수 감소로 임금도 삭감된다. 아예 근기법을 무시하는 현장도 있다.

김유경 공인노무사(방송계갑질119) “사용자들이 기존 제작관행은 그대로 둔 채 처벌만 피하고 보자는 의도로 유연근로시간제를 대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방송스태프지부는 하루 12시간 휴식 보장과 12시간 근무를 요구하고 있다.

김진억 노조 나눔연대국장은 “근기법 개정안이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랜 방송 관행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쪽대본’과 주연배우 위주 촬영 일정, 수익 분배구조가 바뀌어야 할 관행으로 거론됐다. 김진억 국장은 “드라마마다 다르지만 보통 3~4회 정도의 방영분이 촬영된 상태에서 방영이 시작되는데, 촬영분이 소멸되면 시간에 쫓겨 방영 당일까지 쪽대본이 나온다”며 “계획된 일정이 아니라 쪽대본에 따라 촬영하다 보면 동선이 흐트러져 노동시간이 길어진다”고 설명했다. 김 국장은 “완전 사전제작을 하거나 편성시간을 주 2회에서 1회로 줄여야 한다”며 “턴키계약·프리랜서 계약 근절도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노조 “노사 문제로 결방될 가능성” 경고

제작사측도 갑작스럽게 관행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정책적 방향에는 동의한다는 입장이다. 박상주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국장은 “사전제작 확대나 편성시간 개선, 노사정 협의는 제작사도 환영”이라며 “일주일에 70분짜리 프로그램을 두 편 만드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박상주 사무국장은 “제작비가 근본적인 문제”라며 “제작사는 이미 적자고 수익을 만들 수 있는 구조가 사라지고 있는 만큼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토론회에서는 노조활동을 두고 분위기가 격해지기도 했다. 박 사무국장이 “최근 스태프들이 제작사에 의견 관철을 요구하며 투쟁하겠다고 말하는 내용의 녹음 파일을 받았다”며 “대단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하지 말라. 노조가 조직폭력배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됐다. 토론회를 지켜보던 지부 관계자들이 항의했고, 박 사무국장은 사과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노조가 법적으로 대단한 권한을 가진 것이 맞다”며 “노조에 색안경을 끼고 보면 교섭이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는 만큼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진억 국장은 “장시간 노동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한국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노사 갈등 때문에 결방되는 사태도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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