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국제노동기구(ILO) 창립 100주년이다. 100주년에 앞서 한국이 기본협약을 비준하고, ILO 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겠다고 공약했고, 노동존중 사회의 실현이라는 항목으로 국정과제에도 넣었다. 총회 연설은 가능할지 모르나 기본협약을 비준할 수 있을지와 관련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찮다. 여당은 먼저 법률을 정비하고 나서 비준하자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법 개정이 쉽지 않은 일이고, 여당 정치력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가 선 입법이 아니라 선 비준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글을 보내왔다. 4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 ILO 협약 87호, 비준 좌절 가능성 크다
② '부당노동행위 금지' 조약인 ILO 협약 98호
③ 비준권은 대통령에, 국회는 동의권만
 

대한민국은 대통령중심제 국가지, 의회중심제(의원내각제) 국가가 아니다. 의회중심제를 선호하는 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권력은 국회가 아니라 대통령에 있다. 이 말은 사사건건 문제가 생기면 대통령에 호소하러 청와대 앞에 진을 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 권한과 의회 권한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국회 연구단체 ‘헌법33조위원회’는 지난 4일 국회 본청에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 관련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발제자와 위원회 대표의원은 선 비준이 불가능하고, 비준에 대한 최종 권한은 국회에 있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느끼기에 발제자의 강조점은 선 입법에 있었고(비준하지 말자는 이야기로 들렸다), 대표의원의 강조점은 행정부를 통제하려는 국회의 비준 동의 권한에 있었다. 방점이 입법에 찍혀 있든, 국회의 결정권에 찍혀 있든 국회가 비준의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한민국헌법은 비준 주체가 대통령이며, 비준을 위해 대통령이 심의를 거칠 기관은 국회가 아니라 국무회의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조약, 비준 권한은 대통령이 보유

헌법은 국회가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지고(60조)”,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비준하고(73조)”,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사안은 “헌법개정안·국민투표안·조약안·법률안 및 대통령령안(89조)”이라고 밝히고 있다. 헌법에 따르면 국제조약을 비준할 권한은 대통령이 가지며, 국회는 대통령이 비준한 조약이 입법과 재정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 한해 그 조약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비준을 위해 대통령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면 된다.

제헌헌법 이후 70년,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30년 동안 지체돼 온 헌법의 노동 3권 실현을 위한 법 개정에 하루빨리 대통령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고, 협약 비준에 대한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3권을 분립한 헌정 질서에서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악법을 개폐하는 문제는 대통령이 아니라 입법권을 보유한 국회가 고민할 문제다. 대통령이 비준 동의를 요청한 ILO 협약에 동의할지, 거부할지는 국회가 선택할 몫이다. 국회가 비준에 동의할 경우 그 다음 단계로 노동법을 헌법 정신과 국제사회 상식에 맞게 개정할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악법 조항을 21세기에 들어선 지 사반 세기가 다 되도록 유지할지도 국회가 결정할 몫이다.

판문점선언, ‘선 비준-후 입법’ 이미 진행 중

ILO가 만든 국제조약의 비준 문제는 판문점선언처럼 처리하면 된다.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비준을 의결한 뒤 소관 부처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비준을 동의할지, 관련 법령을 고칠지, 비준안 실천에 필요한 국가재정을 허용할지는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다. 행정부는 행정부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국회가 입법한 후에야 행정부가 비준 절차를 개시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 지 30년을 넘어간다.

판문점선언 비준의 근거가 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남북관계발전법) 21조가 명시한 남북합의서 체결·비준 절차를 살펴보자. “1항, 대통령은 남북합의서를 체결·비준하며 통일부 장관은 이와 관련된 대통령의 업무를 보좌한다. 2항, 대통령은 남북합의서를 비준하기에 앞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3항,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남북합의서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남북합의서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4항, 대통령이 이미 체결·비준한 남북합의서 이행에 관해 단순한 기술적·절차적 사항만을 정하는 남북합의서는 남북회담대표 또는 대북특별사절의 서명만으로 발효시킬 수 있다.”

이 법률이 규정하는 절차는 대통령의 비준권 행사를 명시한 헌법 조항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2004년 남북관계발전법이 논의될 당시 법제처 법제심의관은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체결·비준한 남북합의서는, 비록 이 법에 의하지 않더라도 이미 독자적으로 헌법적 근거와 정당성을 갖는 만큼 이 법의 국내법적 효력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법제처가 나서 남북관계발전법을 제정하지 않더라도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이 체결하는 남북합의서(ILO 협약으로 읽자)는 국내법적 효력을 가진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입법과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대통령이 조약을 체결하고 비준한 것은 남북합의서만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도 입법과 재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국회 논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비준했다.

‘선 입법’ 논리, 법적 근거 없어

헌법이 정한 법률적 절차와 지금까지 축적한 국제조약 비준 관행을 ILO 협약에 적용하면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체결·비준한 ILO 협약은 독자적으로 헌법적 근거와 정당성을 갖는 만큼 국내법적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백보 양보해 국회 동의를 얻지 못한 조약은 국내법적으로 무효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국제법상으로는 유효하다는 것이 헌법과 국제법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대통령중심제와 3권 분립을 명시한 헌법에 충실한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ILO 협약의 비준을 가로막는 헌법적 장애물은 없다. 대통령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협약을 비준하고, 법률과 예산에 영향을 미치는 협약은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된다.

헌법33조위원회에서 발제자나 정부 토론자에게 ‘선 입법-후 비준’ 주장의 법률적 근거를 듣고 싶었으나, 헛된 기대였다. 관료도, 교수도, 변호사도,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 정책 담당자도 입법이 돼야 비준할 수 있다는 주장의 법률적 근거를 내놓지 못했다. 대신 “관행에 따르면”이라거나 “논문에 따르면”이라는 실천적으로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주장만 나열할 뿐이었다. 필자가 본 논문엔 이렇게 돼 있다.

“미국을 포함한 22개국의 입법례를 분석한 결과 조약의 체결 권한은 대체로 대통령 또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집행부에 부여돼 있다. (중략) 조약 체결이라는 국가작용의 중점은 역시 집행부에 있고, 의회의 관여는 조약 체결이라는 외교 행위의 성질상 제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공통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비교 헌법적 고찰로 우리의 헌법 해석(비준권은 결론적으로 대통령이 행사한다로 읽자)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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