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이른바 '진상' '갑질' 고객에게서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자는 고객과 노동자 간 문제가 발생할 때 대처방법을 담은 고객응대업무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18일 이 같은 '감정노동자 보호조치'가 담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됐다. 그런데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에 대비해 기업들이 마련한 고객응대 지침이 폭언이나 폭행 위협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현장을 벗어나기에는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7~8단계 거쳐야 가능한 벗어날 권리

롯데백화점은 '존중받을 용기'라는 제목의 고객응대 매뉴얼을 올해 8월 제작했다. 매뉴얼에는 악성 컴플레인 제기 고객을 특별관심고객(ECC)으로 규정하고 ECC 판단기준과 응대 방법이 담겼다. 이를테면 롯데백화점은 매뉴얼에 매장에서 기물파손·폭언·성희롱 등 폭력적 행위를 하며 영업방해하는 경우를 적시하고 "1단계 고객진정→ 2단계 중지 요청→3단계 경고→4단계 응대 종료와 경찰 신고"를 행동요령으로 제시했다.

전화 상담도 마찬가지로 단계별 행동요령을 내놓았다. "고객이 전화로 폭언이나 협박, 성희롱 등을 반복하는 경우 관련 행위 중지를 정중하고 단호한 어조로 3회까지 요청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폭언 등이 지속되면 전화를 끊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일각에서는 매뉴얼이 감정노동자의 작업중지 권리를 명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감정노동자들은 "응대 중지까지 이르는 절차가 너무 길고 복잡해서 실효성이 없다"며 회의적인 표정이다. 서비스연맹 관계자는 "과연 서비스 노동자가 극도로 흥분한 고객에게 폭언을 중지하라고 요청하고 재차 경고하는 방식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오히려 고객을 자극해 더 심한 폭언과 폭행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롯데백화점뿐만 아니다.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국장은 "최근 대형마트 두 곳의 고객응대 매뉴얼을 입수해 분석해 봤더니 7~8단계를 거쳐야 고객 응대를 종료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며 "사실상 고객에게 들을 욕 다 듣고, 맞을 만큼 맞은 상태에서 응대를 종료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는 법 취지를 무시한 탈법적인 고객응대 매뉴얼 "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공공부문에서는 이미 고객에게 폭언이나 성희롱을 당할 경우 1차 경고 후 곧바로 응대를 종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울시 120다산콜센터는 2014년부터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해 악성 민원에게서 상담노동자를 보호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도 올해 5월 '공직자 민원응대 지침'을 개정해 진정 요청 뒤에도 폭언이 지속되면 법적조치 경고 후 상담을 종료하도록 했다. 특히 통화 중 성희롱에 대해서는 1차 경고 후에도 성희롱이 지속되면 바로 통화를 종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시간 이상 장시간 상담을 하거나 민원 담당공무원의 심적 고충이 클 경우 1시간 이내의 휴게시간을 부여한다.

악성고객 응대만 감정노동?

문제는 또 있다. 기업들이 내놓은 고객응대 매뉴얼 대부분이 폭언이나 폭행을 행사하는 악성고객 응대로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정노동은 고객에게 폭언이나 폭행뿐만 아니라 예약을 했는데도 오래 기다려야 하거나 문제가 있는 제품인데도 기업의 AS 제도가 불충분해 발생하는 합리적인 고객 불만에서도 발생한다.

한인임 사무국장은 "현재 기업들의 고객응대 매뉴얼은 비정상적인 소수 고객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감정노동 범위를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정규직이 아닌 입점업체 직원이나 하청노동자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고객응대 매뉴얼이 적용되지 않아 '반쪽짜리'라는 비판도 높다. 롯데백화점측은 "고객 응대 매뉴얼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협력업체에는 매뉴얼을 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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