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훈중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장

지난 5일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의 탄력근로제 확대 합의는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올해 3월 개정된 근로기준법 부칙 3조(탄력적 근로시간제 개선을 위한 준비행위)는 "고용노동부 장관은 2022년 12월31일까지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 확대 등 제도개선을 위한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준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마음가짐이나 주변 조건 등을 미리 채비함"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준비의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여야 정치권은 자신들이 만든 법률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이를 짓밟는 내용에 합의한 것이다. 도대체 여야정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노동자들의 임금·노동조건과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탄력근로제에 합의하면서 당사자인 노동계와 사전에 아무런 논의 과정도 없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우리 정치의 오만과 독선, 반민주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탄력근로제는 연장근로수당 없이 주 52시간까지, 연장근로 포함시 주 64시간까지 장시간 노동이 가능한 제도다. 이는 주 52시간(연장12시간 포함) 노동시간단축법을 무력화하는 내용이다.

주 52시간 노동시간단축법이 현장에 제대로 안착도 하기 전에 장시간 노동이 가능한 탄력근로제 연장에 합의한 정치권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탄력근로제는 노동시간이 줄어 추가인력이 필요함에도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하지 않고 기존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을 시키며 물량을 맞추려는 사용자들의 꼼수다. 따라서 정치권은 노동시간단축으로 노동자 삶의 질을 높이고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노동시간단축법의 기본정신마저 훼손했다.

주 52시간 노동제는 지금 당장 모든 사업장에 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올해 7월1일부터 공공부문 및 300인 이상 사업장에 도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2020년 1월1일부터 50인 이상 사업장, 2021년 7월1일부터 5인 이상 사업장에 단계별로 도입하도록 돼 있다. 지금 도입 중인 사업장은 공공부문과 300인 이상 사업장이다. 기업의 요구가 있었다면 300인 이상 대기업이거나 공공부문이다. 공공부문과 대기업이라면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추가고용 여력이 있는 곳이다. 탄력근로제 확대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신규고용 창출이라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 먼저다. 만약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은 중소기업의 요청이라면 순전히 엄살이며 노동시간단축을 형해화하려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여야정 합의안에는 노동계가 요구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과 이에 따른 노동관계법 개정, 사회안전망 강화 같은 내용이 빠졌다. 사용자들이 요구하는 내용만 포함됐다. 최저임금법이 개악돼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된 데 이어 또다시 탄력근로제 확대 등 사용자들의 요구만 반영된 것이다.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하는 정부로 정권이 바뀐 게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존중 사회 실현에 대한 정부·여당의 의지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런 식으로 정부·여당이 노동존중 사회에 대한 약속을 뒤집는다면 노동자들의 불신은 서서히 쌓여만 갈 것이다. 그렇기에 여야정 합의는 신뢰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적 대화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다. 22일로 예정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본위원회가 제대로 열릴지 걱정이다. 안 그래도 노동계 일부가 사회적 대화 실효성을 불신하고 있는데, 그 불신에 정당성과 명분만 주는 셈이다.

한국노총은 17일 탄력근로제 확대를 비롯한 근로기준법 개악 저지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을 요구하며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다. 정부·여당은 한국노총 노동자대회가 본격적인 대정부 투쟁 선포식이 되고 노정관계가 파탄 나길 원치 않는다면 탄력근로제 확대 합의안을 즉각 폐기해야 한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는 근기법 부칙에 명시된 대로 주 52시간제가 완성되는 2022년 12월31일까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한 후 도입 여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우리나라 노동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처럼 연간 1천800시간 이하로 줄어들 때 할 일이지 2천시간이 넘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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