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우 공인노무사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대상판결 : 대법원 2018. 10. 12. 선고 2015두38092 판결



1. 들어가며

하나의 망령이 여전히 노동법을 장악하고 있다. ‘사용종속관계’라는 망령이.

우리 헌법은 두 개의 노동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노동의 권리(헌법 32조)와 노동 3권(헌법 33조)이다. 근로기준법이 전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노동법이라면, 후자의 대표 법률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다. 각기 다른 기본권을 기초로 만들어진 법률이니 양 법률의 적용대상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근기법은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보장하고 강제하기 위한 법이므로 특정한 사용자에게 고용돼 현실적으로 취업하고 있는 상태일 것을 전제로 하며,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가 근로자다. 반면 노조법은 노동 3권을 보장할 필요성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특정 사용자에게 고용된 취업상태일 필요가 없으며, 임금보다 넓은 개념으로서의 수입에 의해 생활하는 자라면 노조법상 근로자다.

불과 10여년 전 ‘서울여성노조 사건’(대법원 2004. 2. 27. 선고 2001두8568 판결)에서 대법원이 처음으로 각 법률상 근로자를 구분하는 당연한 판결을 내린 이후에도 법원은 한동안 양자를 혼동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참고로 본 판례리뷰 대상 사건의 1심 법원 판결 역시 양자를 구분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행히 근래 대법원은 양자를 구분하고 있으며, 최근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사건’(대법원 2018. 6. 15. 선고 2014두12598·2014두12604 판결)에서는 근기법상 근로자와 달리 노조법상 근로자를 판단하는 나름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본 판례리뷰의 대상 판결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 기준을 따르고 있다. 다만 여전히 ‘사용종속관계’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다.

2. 사건의 개요

한국방송연기자노조는 방송사에 전속된 연기자를 제외하고 방송사로부터 등급을 부여받고 있거나 그에 준하는 출연료를 지급받는 방송연기자를 가입대상으로 하는 직종별 노동조합이다. 1992년부터 공중파방송 3사와 연기자 출연료 등에 대해 교섭을 해 단체협약을 체결해 왔고 2007년부터는 각 방송사별로 교섭을 진행하고 단체협약(출연료합의서 포함)을 체결했다.

그런데 2012년 한국방송공사(KBS)와의 임금교섭(출연료 협상)이 결렬돼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 조정신청을 했으나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이에 노조는 조정신청을 취하한 후 2013년 1월 KBS 소속 근로자와 KBS 방송출연 연기자 간의 교섭단위를 분리해 달라고 서울지노위에 신청했다.

서울지노위는 교섭단위 분리 결정을 내렸으나(2013. 2. 8. 결정 서울2013단위1), 중앙노동위원회는 조합원 중 KBS에 소속된 근로자가 없고 KBS 방송에 출연하더라도 사용종속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노조의 신청인적격을 부정해 초심신청을 각하하는 결정을 내렸다.(2013. 3. 26. 결정 중앙2013단위3)

노조가 중앙노동위 결정 취소를 구한 행정소송의 1심 법원은, 방송연기자들은 개인사업자라며 이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노조 역시 방송연기자들의 이익집단일 뿐 노조법상 노조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판결을 했다.(서울행법 2013. 11. 8. 선고 2013구합11031 판결)

이에 반해 2심 법원은 ① 연기자의 전문성 때문에 일정한 재량은 있으나 업무수행과정에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지휘·감독을 받는 점 ② 노무제공이 KBS가 결정한 시간과 장소의 구속을 받는 점 ③ 출연료는 노무제공의 대가로 미리 정해진 정액의 급여를 받는 점 ④ 연기자가 3자를 고용해 업무를 대행하게 하는 등 독립해 자신의 계산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거나 노무제공을 통한 이윤창출과 손실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다 보기 어려운 점 ⑤ 약 25년간 단체교섭과 조정신청을 하는 등 노조법상 법률관계가 형성돼 정착돼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노조 조합원인 방송연기자의 노조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했다.(서울고법 2015. 1. 22. 선고 2013누50946 판결)

3. 대법원의 판단

이 사건의 3심 대법원은 “노조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는 노무제공자의 소득이 특정 사업자에게 주로 의존하고 있는지, 노무를 제공받는 특정 사업자가 보수를 비롯해 노무제공자와 체결하는 계약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지, 노무제공자가 특정 사업자의 사업 수행에 필수적인 노무를 제공함으로써 특정 사업자의 사업을 통해서 시장에 접근하는지, 노무제공자와 특정 사업자의 법률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지속적·전속적인지, 사용자와 노무제공자 사이에 어느 정도 지휘·감독 관계가 존재하는지, 노무제공자가 특정 사업자로부터 받는 임금·급료 등 수입이 노무 제공의 대가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사건’ 판결의 노조법상 근로자 판단기준을 그대로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은 근거로 방송연기자를 노조법상 근로자로 인정했다.

① 결과적으로 KBS가 보수를 비롯해 방송연기자와 체결하는 계약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점 ② 방송연기자가 제공하는 노무인 방송연기는 KBS의 방송사업 수행을 위한 필수적 요소 중 하나며, 방송연기자는 방송사업자의 방송사업을 통해서만 방송연기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점 ③ 방송연기자의 연기는 KBS가 결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뤄지고 연출감독 등의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지시를 받으며 진행돼 업무 수행과정에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지휘·감독을 받는 점 ④ KBS로부터 받는 출연료는 기본적으로는 방송연기라는 노무 제공의 대가에 해당하는 점 ⑤ 그동안 방송연기자가 노조법상 근로자이고 노조가 노조법상 노조임을 전제로 KBS가 단체교섭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해 온 점 ⑥ 방송연기자 중에는 KBS에 전속된 것으로 보기 어렵거나 소득이 KBS로부터 받는 출연료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방송연기자와 참가인(KBS) 사이 노무제공관계의 실질에 비춰 보면 방송연기자로 하여금 노동조합을 통해 방송사업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노무제공조건 등을 교섭할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이 크므로, 전속성과 소득 의존성이 강하지 아니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들어 방송연기자가 노조법상 근로자임을 부정할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4. 판결의 시사점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은 무엇보다 노조법상 근로자 판단에서 핵심이어야 할 위 ⑥의 기준을 주요하게 제시한 점과 사용종속관계가 상대적으로 약한 방송연기자라는 노무제공자에 대해 특정한 사업자와의 전속성과 소득의존성을 핵심적인 판단기준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헌법상 기본권인 노동 3권 보장 취지에 따라 노조법상 근로자인지의 여부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보다 ‘노무를 제공받는 사업자가 보수를 비롯해 노무제공자와 체결하는 계약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지’와 ‘노무제공자가 사용자의 사업 수행에 필수적인 노무를 제공함으로써 사업자의 사업을 통해서 시장에 접근하는지’, 그리고 ‘노동조합을 통해 해당 사업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노무제공조건 등을 교섭할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이 큰지’여야 함이 타당하다.

대법원이 근기법상 근로자와 노조법상 근로자를 구분하는 입장을 갖고 있으나 이 사건 판결에서 인용한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사건’ 판단기준 역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양자의 본질적 차이를 찾기 어렵다. 여전히 특정 사업자에의 전속성과 지휘·감독관계를 따지는 ‘사용종속관계’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제는 사용종속관계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경제적 종속성’(교섭력의 비대등성)을 핵심 기준으로 근로자 여부를 판단하고 ‘노무제공 과정을 지배하는 자’를 교섭의무가 있는 사용자로 규정하는 새로운 판단기준 정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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