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한 세대가 저물고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험한 뒤 '판'에 뛰어든 노동운동가가 얼마 전 이순이 됐다. 며칠 후 정년퇴직한다. 민주노총 태동에 힘을 실은 뒤 20년 동안 함께해 온 김태현(61·사진) 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얘기다. 그는 초대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으로 활동했다. 민주노총의 운동방향과 전략을 짰다. 14일 퇴임식이 열린다. 민주노총에서 정년을 맞은 첫 활동가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 13층 회의실에서 김태현 연구위원을 만났다.

- 오랜 기간 노동진영에 머무르게 한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1세대 운동가들이 그랬듯 80년대에 현장에 들어왔다.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일이다. ‘세상을 바꾸겠다, 혁명을 하겠다’고 뛰어들었다. 대중운동 속에서 함께해야 세상을 제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런 생각이 오랜 기간 노동운동을 하게 된 이유다.”

- 뿌듯했던 순간과 아쉬웠던 순간을 꼽자면.

“96~97년 총파업이 가장 뿌듯하다. 민주노총 건설 1년 만에 총파업을 성사시켰다. 정권의 일방적인 노동법 개악을 막아 냈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위상이 가장 높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정책연구자로서 기억에 남는 것도 있다. 민주노총이 최저임금위원회에 참여한 뒤 최저임금 인상 규모가 2배가 됐다. 대중과 연대해 투쟁한 것이 요인이었다. 아쉬운 점은 외환위기 이후 극심화한 노동시장 양극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연대임금정책을 펴기도 했는데 내부 반발에 추진력을 얻지 못했다. 최근 조건이 바뀌어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가 이를 실현하려 한다. 민주노총이 과제로 삼아 지속적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

- 여러 차례 내부 계파갈등 문제를 지적했다.

“지금도 주요 계파들이 노동운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권력지향적인 것도 문제다. 민주노총이 두 차례 진보정당 통합을 추진했는데 실패했다. 헤게모니 싸움이 분열의 원인이었다. 지향점을 두고 입장차가 있었다. 당내 패권 문제에 대한 해법이나 비전 차이에 대한 토론이 없다. 이런 조건에서 통합은 불가능하다. 민주노총 자체가 각 정파의 연합으로 구성돼 있는 것도 통합에 걸림돌이었다. 정파를 향한 충성심이 민주노총에 대한 충성심보다 컸다. 지난 집행부가 진보정당 통합안을 정책대의원대회에 제출했는데 가장 적은 표를 받았다. 각 정당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지금도 민주노총에 미루고 있다. 민주노총 스스로 과거 실패를 극복할 여건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 문재인 정부 들어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는 무엇이라 보나.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 1만원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런데 최저임금법 개정을 통해 산입범위를 개악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도 확대한다고 한다. 이런 흐름에 노동계가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정부와 노동계를 대립시켜 대통령 지지율을 떨어뜨리려는 보수언론의 선동이 있다. 정부가 개혁정책을 냈을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외환위기 이후 민주노조 운동이 정규직 중심이었다는 비판을 샀다. 촛불혁명 이후 민주노총 조합원이 대폭 늘었는데, 아직까지 이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언론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스스로의 성찰과 혁신이 필요하다.”

- 사회적 대화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

“민주노총이 처한 현실이 96·97년과 다르다. 젊지도 않고 일사천리로 대의에 복무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다. 총파업으로 지금의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어렵다. 정부의 전체적인 정책 기조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로 노동진영이 엄청난 전진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본다. 결국 집행부 의지에 따라 사회적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 그런데 현 집행부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무엇을 관철하고 무엇을 이루려는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 퇴직을 앞뒀다. 소감이 궁금하다.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돼 홀가분한 기분도 든다. 아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이 해소되지 않아 아쉬움도 크다. 노동운동의 과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엄혹한 시절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노동운동의 토대를 형성한 것이 1세대의 역할이었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운동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헬조선 시대, 비정규직과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이다. 저출산·고령화·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도 새로운 세대의 과제다. 퇴직 후 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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