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윤희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근경색을 앓은 후 직장에 복귀하지 못했다. 노동 말고는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었던 그는 주치의에게 가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심초음파 결과를 본 심장내과 의사는 걱정스런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일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절대 일하지 마세요.”

다니엘은 심한 심부전 상태였기에 의사는 업무 부적합 소견을 철회하지 않았다. 월세도 못 내고 전기세도 밀린 다니엘은 실업자연금을 받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다 전기도 끊기고 월세 집에서 쫓겨나기 바로 전 연금 혜택을 결정하는 자리에 간신히 인터뷰 기회를 따냈다.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인터뷰였다. 그 인터뷰를 앞두고 다니엘은 화장실에서 쓰러져 죽는다. 지나친 스트레스가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이다.

영국의 유명 좌파 감독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내용이다.

나에게 업무적합성 평가 대상으로 지정된 노동자 이씨는 다니엘 블레이크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심장 상태가 노동 자체를 아예 금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심초음파 결과는 좌심실 구혈률(심실이 수축하며 피를 짜내는 정도)이 정상의 반 정도로 떨어져 있었기에 그냥 일하게 내버려 두면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씨에게 제대로 업무적합성 평가를 하려면 철저히 객관적인 자료들이 바탕이 돼야 했다. 3차 병원에서의 운동부하 검사, 주치의 소견서, 진단서·처방전을 토대로 환자의 현재 건강상태를 정확하게 평가하고자 했다. 또 하루 날을 잡아 그와 인터뷰를 하고 현장도 돌았다. 이씨는 자동차부품 제조회사의 보전반에 속해 있었다. 특정 라인에 배정돼 있는 게 아니라 대기하고 있다가 고장 난 기계를 고치거나 필요한 부품들을 만들어 내는 등의 불규칙적이고 일정하지 않은 업무를 했다. 현장을 돌며 심장에 영향을 미칠 요인들을 살폈고, 그 시간 내내 나는 사측과 노측에 “의사로서 중립을 지킬 것이며, 모든 잣대는 ‘노동자의 건강’ 하나만으로 삼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결과는 일정 조건하 업무 적합으로 나갔다.

그러나 내가 단 조건들은 현장 동료 노동자들의 반발을 샀다. 그런 작업 조건을 걸면 이씨한테 시킬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 반발의 요지였다. 이씨는 급작스런 상황을 대비해 혼자 일해서도 안 됐고, 20킬로그램 이상의 심한 하중을 받는 일에서 배제돼야 했으며 그 외에도 페인트나 시너 등 유기용제를 사용하는 작업에서도 배제돼야 했다. (이 모두는 심장에 악영향을 미치기에 필수적인 조건들이었다.) 노조가 강한 곳이었고, 노동자들의 관계도 강한 노조 덕에 비교적 팍팍하지 않은 사업장이었다. 그러나 매번 아픈 그를 위해 더 힘들고 더 유해한 일을 누군가가 대신 해 준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회사는 그에게 갑작스런 작업변경 발령을 내렸다. 나는 다시 사업장에 가서 그가 일할 수 있는 공정들을 살피고 그중 가장 심장에 하중이 안 가는 좌식업무인 부품 검사직을 권했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플랜 A가 현실에 적용되지 못했지만 플랜 B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업무적합성 평가를 하고, 노동자 건강에 가장 적합한 공정으로 작업변경을 시켰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이씨는 회사를 그만뒀다. 충격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급여가 적었다. 비록 좌식업무였으나 20년 넘게 해 온 기존 업무를 그만두고 새 업무를 배운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검사작업의 노동강도는 약했지만, 대기하고 있다가 필요시 출동해서 힘 한번 쓰고 오는 예전 업무보다, 종일 좌식으로 앉아서 쭈그린 자세로 검사를 하는 작업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일할 수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적절히 현장에서 배려만 해 준다면 업무에 적합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사측도 노측도 아파서 죽다 살아난 환자를 위해 깍듯한 배려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우리나라 노동환경이 너무나 척박하다. 노동자는 격무에 시달리고 회사는 산재 하나 일어날까 벌벌 떤다. ‘노동자 건강’ 역시 조금 더 전인적(全人的) 관점으로 살펴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번 사례로 노동자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 중 객관적 의학검사 수치 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사회·심리·경제적 요인들이 작동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업무적합성 평가는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일하게 하는 데 쓰여야 한다. 누군가를 더 낙인찍히거나 어우러져 작업하기 어렵게 만들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 적용은 절대 녹록지 않다. 이 과정에 더 많은 현실적·철학적 고민들이 함께 진행돼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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