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남해 다도해 어느 섬이었던 것 같다. 그 겨울에 거기를 어떻게 가게 됐는지 동행이 누구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때 나는 수배 중이었으므로 어찌 흘러흘러 그곳까지 갔던 것 같다. 글을 쓰러 온 작가 흉내를 내며 숙소를 정하고 며칠을 묵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 할 형편이었기에 방안에 있거나 혼자 섬 주변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해변 어느 양지바른 바위틈에 소담하게 피어 있는 예쁜 꽃을 만났다. 수선화였다. 끊임없는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에도 파랗고 부드러운 잎을 흔들며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눈길을 주기만 해도 달콤한 향기가 이슬처럼 콧등에 매달렸다. 정호승의 <수선화에게>가 떠올랐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당시 내 처지 때문이었는지 상당히 위로가 됐다.

정호승 시인은 대구의 어느 중학교를 같이 다닌 어릴 적 동무다. 중학교 때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진 않았지만 교내 백일장에 함께 나가 같이 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정호승이 장원이었고 나는 차하였는데 3등쯤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다른 학교로 가는 바람에 헤어졌는데 정호승은 문학쪽으로 계속 정진해 인기 시인이 됐다. 호구지책으로 조선일보 기자가 됐는데 월간조선에서 상당 기간 근무하다가 그만뒀다. 여러 가지 갈등과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교사로 출발해 교육운동 노동운동의 길을 걸으며 서로 다르면서 바쁘게 살았는데 언론 등에서 이름을 대할 때마다 서로 애틋해 했다.

2009년 1월 용산참사가 터졌고 8월에는 쌍용자동차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당시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었는데 그해 한 해를 용산의 남일당과 평택의 쌍용자동차 정문 앞 농성장에서 많이 보냈다. 하루하루 일들과 생각을 시로 표현해서 인터넷신문 <참세상>에 연재를 했는데 11월에 투쟁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집으로 엮기로 했다. <사람이 사랑이다>는 표제의 시집이었는데 그때 정호승 시인에게 책 뒤표지의 날개글을 부탁했더니 기꺼이 써 줬다.

“이수호의 시는 아프다. 그의 시를 읽으면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에 강하게 머리를 맞은 듯하고 연약하나 날카로운 풀잎에 깊숙이 살을 베인 듯하다. 그의 시에서 전해져 오는 맑은 통증은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만 견딜 수 없어 땅바닥을 나뒹굴게 하기도 한다. 그의 시 곳곳에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고통의 눈물이 먹물처럼 번져 있다. 누가 이 먹물 같은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까.(후략)”

과장이 조금 심했지만 내 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고마웠다.

지난 초가을이었다. 제주에 계시는 고경생 선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수선화 알뿌리를 좀 보낼 테니 겨울에 꽃도 보고 향기에도 취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고경생 선생은 제주에 계시는 분인데 백기완 선생님을 무척 존경해서 모시고 간 나까지 덩달아 좋아해 페이스북 친구가 됐다. 때맞춰 유기농 귤도 보내 주곤 했는데 페이스북에 올린 수선화 사진을 보고 내가 좋아했더니 그렇게 알뿌리를 보낸 것이다. 어떻게 보관하고 언제 심는 등 자세히 써서 보냈건만 바쁘다는 핑계로 결국 때를 맞추지 못해 꽃을 피우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나는 그럴 수 없어 몇 송이는 잘 피었고 향기도 맡고 있다고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소식에 무척 기뻐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고경생 선생이 급성 무슨 암으로 입원했는데 거의 말기라는 것이었다. 아들이 서울에 있어 어느 전문병원으로 올라왔다는데 차일피일하면서 아직 찾아뵙지도 못했다.

다시 수선화의 계절이 왔다. 수선화가 모진 추위에도 죽은 듯한 알뿌리에서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는 것처럼 고경생 선생도 그렇게 다시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백 선생님 모시고 수선화 핀 고 선생 농장에 가겠다고 한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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