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우람 기자
지난 18일 산업통상자원부와 고용노동부는 4개의 문장이 적힌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석탄발전소 중대재해 사고원인 분석 등을 위한 ‘특별산업안전조사위원회’를 국무총리 주도로 구성하겠다는 내용이다. 발전소 연료·환경설비 운전·경상정비 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여부를 논의하겠다는 계획도 담겼다.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가 지난 11일 정부에 요구한 것에 대한 응답이었다. 정부는 재발방지를 위한 책임자 처벌이나 위험의 외주화 중단 같은 당장 필요한 핵심적인 조치는 언급하지 않았다.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김용균씨 사망 이후 가장 많은 노동자와 시민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다.

김용균씨는 지난달 11일 새벽 한국서부발전 태안 화력발전소 운송설비를 점검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 당시 김씨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유가족은 정부가 재발방지를 위한 책임 있는 조치를 내놓을 때까지 장례를 거부하고 있다.

정부 대응이 표류하는 사이 고인은 차가운 냉동고 안에서 새해를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 나서 설 전에 장례가 치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재벌 총수와 청와대 만찬, 비정규직은 구치소 가두나"=민주노총은 이날 위험의 외주화 중단과 김용균씨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었다. 김용균씨 추모집회로는 가장 많은 1만여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앞뒤에 “내가 김용균이다” “비정규직 이제 그만”이라고 쓴 손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는 “세월호 참사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생긴 것이라면 김용균씨의 죽음은 정부가 나선 공공부문 외주화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사안”이라며 “산재 사고니까 이쯤에서 끝내라는 세력에 맞서 여러분들이 끝까지 유가족을 지켜 달라”고 호소했다.

가수 박준씨를 비롯한 문화노동자 6명이 무대에 올라 <전선은 하나>를 불렀다. 현장발언이 이어졌다. 당초 마이크를 잡을 예정이었던 김수억 금속노조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장을 대신해 차헌호 노조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장이 무대에 섰다.

김수억 지회장을 비롯한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를 요구하는 비정규직 100인 대표단' 소속 노동자 6명은 전날 청와대 정문 앞에서 기습시위를 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5명은 당일 석방됐지만 김 지회장은 서울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영장실질심사는 21일로 예정돼 있다. 차헌호 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범죄자인 재벌·대기업 총수는 청와대에 불러 만찬을 벌이면서도 대화를 요구하는 비정규직은 구치소에 가두는 잘못된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50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용균이의 어머니가 비정규직 대표자가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끝날까 두렵다’고 하셨다”며 “어머니가 우리들을 위해 싸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머니를 위해 끝까지 함께 싸우자”고 외쳤다.

민주노총은 고인과 같은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비정규직 철폐·위험의 외주화 금지 △발전소 비정규직의 발전 5개사 직접고용 △김용균 노동자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김명환 위원장은 “김용균 노동자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죽음이 있고서야 불완전하나마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부개정할 수 있었다”며 “그렇다면 이제는 시커먼 석탄을 떨구며 돌아가는 화력발전소 컨베어밸트가 사람 목숨을 잡아먹지 않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김 위원장은 “사고를 예방하려면 철저한 진상규명과 엄중한 처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한다”며 “민주노총은 살인을 반복하는 기업을 처벌하고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지 않고, 노동자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모든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100만 조합원의 뜻을 모아 불굴의 의지로 함께 싸워 가겠다”고 말했다.

◇"정규직 전환 검토? 기존 약속보다 후퇴"=같은 자리에서 시민대책위원회 주최로 ‘고 김용균 5차 범국민 추모제’가 열렸다. 샌드아티스트 서인승씨가 김용균씨의 짧은 인생을 상징적인 모래그림으로 표현했다. 고인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무대에 올랐다. 쉼 없이 눈물을 흘리며 발언을 이어 갔다.

“대통령에게 지금이라도 아들 용균이가 일했던 곳을 가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그래야만 왜 정규직 전환만이 용균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제 정신은 한 번 죽었습니다.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은 용균이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용균이의 동료를 살려 낼 수 있다면 죽어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김혜진 시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은 “정부가 보도자료를 통해 발전소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는데, 기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속보다 후퇴한 내용”이라며 “정부가 지금 이 상황만을 넘기자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비판했다.

◇"이재용 아들과 용균이 목숨 모두 다 소중"=김용균씨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다는 가수 나얼씨의 <바람기억>이 광장에 흘렀다. 고인의 돌잔치·졸업·군입대를 기념해 찍은 사진이 무대 위 스크린에 떠올랐다. 송경동 시인은 추모시 <컨베이어벨트를 멈춰라>를 낭독했다.

416합창단과 평화의 나무 합창단이 <인간의 노래>를 추모곡으로 불렀다. 단원고 2학년5반 고 이창현군의 어머니 최순화씨는 “문재인의 아들, 이재용의 아들, 정의선의 아들 목숨과 창현이·용균이의 목숨은 모두 다 소중하다”며 “수학여행을 가다, 일하다 죽어도 되는 목숨은 없다”고 호소했다. 최씨는 “우리들이 모두 다 한목소리를 낼 때 아이들의 죽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오후 5시께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비정규직 철폐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 “죽음의 외주화 중단하라”고 외쳤다.

시민대책위는 김용균씨 49재를 맞는 27일 6차 범국민 추모제를 연다. 설 전에 고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투쟁 수위를 높인다. 22일에는 태안 화력발전소에 있는 분향소를 서울로 옮긴다. 같은날 시민대책위 대표자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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