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보상보험법 입법목적은 업무상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는 것이다. 업무상질병 판정 과정에서 공정성과 일관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신속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업계 전문가들은 업무상질병 처리가 더디다고 비판한다. 60일 이내에 마무리하라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가 1천일 동안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와 공인노무사들이 신속한 판정이 필요한 이유와 개선방안을 보내왔다. 4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 상임활동가)

2014년과 10월과 2015년에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보상신청을 한 삼성반도체 포토공정 여성노동자 박○○·구성애님의 ‘루푸스’ 요양급여 신청건은 아직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3·4년씩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역학조사를 하느라 지체됐다는 것이다.

2015년 집단 산재보상신청을 했던 또 다른 삼성반도체 여성노동자의 희귀 뇌종양 사건은 3년 만인 2018년 12월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가 열렸다. 3년간 역학조사를 실시한 줄 알았더니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아무런 역학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있다. 삼성반도체 기흥 3라인(고 황유미씨와 같은 라인, 같은 공정) 백혈병 사망자 김○○님 유족급여 신청건(2016년 12월 신청)도 그랬고, 같은 기흥공장 유방암 피해자의 요양급여 신청사건(2016년 12월 신청)도 2년째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아무 조사 없이 머무르다 질병판정위에 회부됐다.

지난해 8월 고용노동부가 산재처리 간소화 방침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노동자의 백혈병·뇌종양·다발성경화증 등 산재를 인정받은 8개 상병에 대해서는 역학조사를 생략하겠다고 하자,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그동안 몇 년씩 아무런 조사 없이 가지고 있던 사건들을 공단에 보낸 것이다. 이 긴 시간의 공백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무책임하게 버려진 시간 앞에서 재해노동자들과 유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앞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사업장에서 산재로 인정된 사례와 동일(유사)공정, 동일 질병의 경우에는 역학조사를 생략하겠다고 하므로 위와 같이 일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결코 단언할 수 없다. 다양한 공정, 다양한 질병 중에 이제 겨우 8개 상병에 대해서만 인정이 됐기에 앞으로도 역학조사를 받는 경우는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파킨슨병, 반도체 잉곳(Ingot) 제조공정 백혈병 등 여러 사건이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역학조사 중이다. 따라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1조 목적에 명시한 ‘신속한 보상’을 위배하는 역학조사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산재보상을 신청하고, 재해조사가 진행되고, 필요에 따라 역학조사가 진행되고, 질병판정위가 열리고 결론을 내서 재해자에게 결과를 통보하기까지 전 과정에서 ‘신속한 보상’을 위해 피해노동자와 가족을 배려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얼마 전 삼성SDI 수원사업장의 반도체 식각소재(화학물질) 개발 연구원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0대 초반의 젊은 연구원은 발암물질을 취급했는데도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었다. 그는 백혈병 투병 중 산재신청서를 작성해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했다. 재해경위서에 그는 화학물질 개발 연구원으로서 고온 과정에서 벤젠에 노출될 수 있었던 점과 국소배기장치조차 없었던 열악한 환경을 자세히 기술했다. 그가 쓴 재해경위서 내용만 읽어보더라도 위험이 충분히 감지된다. 그러나 산재보상신청을 하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10개월간 그는 공단에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가 중환자실에서 위아래로 피를 연거푸 토하며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유가족들의 상처는 너무도 깊다. 얼마 전 유족들과 함께 근로복지공단 수원지사를 찾았다. 업무상질병판정위 심의를 2개월 이내 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요양급여신청서 서식에는 처리기간이 그보다 짧은 7일이라 적혀 있는데, 도대체 공단에서 10개월간 방치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자 28일 내부감사가 끝나면 답하겠다고 했다.

유족은 이제 또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물었다. 뒤늦게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역학조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이제와 역학조사를 진행하면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리는 것인지 두렵다. 삼성은 이미 증거인멸에 착수했고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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