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

명문세가의 백세청풍 절의

독립운동가 중에는 이른바 ‘명문가’ 출신이 적지 않지만 대대로 권세를 누리던 이른바 ‘명문세족’ 집안이 통째로 망명한 것은 이회영 일가가 유일하다. 우당 이회영의 10대조인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이래 다섯 번의 병조판서, 세 번의 좌우 정승과 영의정을 지냈다. 이항복 이래 아버지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9대조 이정남 외에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냈다. 그런 명문가의 여섯 형제,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이 모두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가 망할 때 이른바 권문세가들은 상당수가 일제로부터 작위와 큰 하사금을 받고 친일파가 됐다.

이상재는 이들 형제의 행위를 “동서 역사상에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며 높이 찬탄했다.

일가족 망명과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경영

이회영은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성정이 호방하고 일찍부터 의식이 깬 ‘자유인’이었다. 이회영은 고루한 정통 유학인 성리학에서 벗어나 지행합일의 양명학을 공부하면서 이상설을 중심으로 여준·이강준 등과 함께 구국의 뜻을 키웠다. 이회영은 1904년 서울 상동교회(감리교) 부설 민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상동교회에는 많은 우국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이회영은 상동교회에서 만난 전덕기·이동녕·양기탁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회영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고종황제에게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허구성을 폭로하도록 건의했다. 이회영의 건의를 들은 고종은 이상설을 정사, 이준·이위종을 부사로 결정하고, 전덕기의 처이종자매인 고종의 침전내인 김 상궁을 통해 신임장을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 허버트의 도움을 받아 헤이그밀사 사건이 결행됐다. 헤이그밀사 사건의 실질적인 조직자가 이회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이그밀사 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 여파로 고종이 퇴위되고, 조선 군대가 강제해산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회영은 만주에 독립군 기지 건설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1910년 7월 이회영은 6형제를 설득해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정했고, 6형제의 가족 등 60여명은 그해 12월 국경을 넘었다. 이때 이회영 일가가 급히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돈은 약 40만원이었다. 당시 한 섬이 3원가량이었으니 이를 현재 쌀값으로 환산하면 대략 600억원이다. 이는 둘째형 석영이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가면서 물려받은 남양주·포천 등지 1만여석의 광대한 땅을 급히 처분해 마련한 것이었다. 석영은 만석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썼고, 나중에는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고 굶주리다가 이국땅에서 생을 마쳤다.

이회영 일가는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안동 등지에서 망명해 온 이상룡·김동삼·김대락 등과 함께 최초의 한인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설립하고 그 부설기관으로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학교는 1920년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꿨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결국 문을 닫았지만 처음 설립 때부터 이름과 상관없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활용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1920년대 독립군의 저 빛나는 전승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군 양성활동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무정부주의자로 사상적 진화를 이루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바탕으로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애초 이회영은 정부라는 형태의 조직을 만들 경우 지위와 권력을 둘러싸고 분규가 심해질 것이라며 임시정부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회영의 주장과는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임정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이 심화됐다.

이회영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는 베이징에서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있던 이을규·이정규 형제, 러시아 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진 조소앙, 의열단에 관련돼 있던 신채호·김창숙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회영은 이들과 교류하면서 독립 후 건설될 사회는 국가 사이의 민족자결 원칙만이 아니라 민족 내부에서의 자유와 평등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그는 1924년 신채호·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행했다. 의열단의 요청으로 단재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도 우당 이회영과의 토론을 기초로 나온 것이었다.

이회영·신채호 등의 지도로 이석영의 아들 규준, 이회영의 장남 규학, 그리고 이상춘 등 청년들이 유자명과 협의해 다물단을 조직했다. 다물단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친일파와 밀정을 처단하는 것이었는데, 밀정 김달하를 처단하면서 이회영과 가족들이 위험에 처했다. 이 시기 이회영과 가족들은 가장 힘든 생활고를 겪었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활동 자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국내로 들어왔다.

1930년 4월20일 이회영은 상하이에서 유자명·정화암·이강훈·백정기·장도선·정해리·유기석·안우생 등과 아나키스트 무장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이회영은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1931년 10월 중국인 아나키스트 왕야차오(王亞樵)·화쥔스(華均實) 등과 함께 10월 공동으로 항일구국연맹과 일본기관에 대한 직접 공격을 위해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은 이회영·정화암·왕야차오등의 지도로 상하이 북역 사건, 아모이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톈진항 일본 군수물자 폭파사건, 톈진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왕징웨이(汪精衛) 암살 시도 사건 등을 벌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독립과 평등, 이상사회를 향한 투쟁

상하이·톈진 등에서 맹렬하게 활동하면서도 이회영의 마음은 언제나 만주에 가 있었다. 그는 만주로 가서 와해된 독립운동 조직을 일으켜 세우고 이를 통해 일제 요인과 기관을 처단, 폭파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이회영은 관동군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의 기운을 다시 한 번 크게 일으키고자 했다. 동지들은 위험하다고 강력히 만류했으나 이회영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이회영은 1932년 11월 초 단신으로 상하이를 떠났다. 아들 규창의 전송을 받고, 황푸강(황포강)에서 배를 타고 다롄으로 향했다. 이것이 생의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후 그의 행적은 사라졌다. 그리고 같은달 24일 그의 사망 사실이 신문기사로 발표됐다. 이회영은 밀정의 밀고로 다롄 수상경찰에 체포됐고,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다가 뤼순감옥에서 11월17일 사망했던 것이다.

이회영의 사망 사실을 접한 동지들은 그를 밀고한 밀정을 찾아내 복수했다. 밀고자는 석영의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둘째아들 규서와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의 처조카 연충열이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상하이의 거류민회 회장 이용노가 있었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엄형순과 함께 배신자들을 처단했고, 그 때문에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엄형순은 사형이 선고돼 집행됐고, 이규창은 징역 13년이 선고돼 8·15 해방 때까지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1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회영의 시신은 만주에서 화장돼 딸 규숙의 품에 안겨 신징(지금의 장춘)을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한줌 재가 된 그의 시신은 1932년 11월28일 새벽 황해도 장단역에 도착했다. 부인 이은숙은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6세의 규동과 함께 영구를 맞이했다. 이회영의 시신은 변영태·여운형·장덕수·유진태 등 수백 명 인사들의 애도 속에 개풍군(파주) 선영에 안장됐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이상사회 건설을 향해 쉼 없이 달려온 66년의 파란만장한 삶이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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