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총회가 6월10일부터 21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다. 이번주는 ILO 기본협약 비준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시기다. ILO 협약 189개 가운데 한국 정부가 비준한 협약은 29개에 불과하다. ILO 모든 회원국이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기본협약은 8개 중 4개만 비준한 상태다. 촛불시민 지지를 받고 노동존중 사회를 약속하며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비준한 ILO 기본협약은 전무하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 윤효원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가 ILO 탄생과 협약 제정을 둘러싼 역사를 살펴보고 비준 방향을 모색하는 글을 보내왔다. 5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글 싣는 순서]

1. ILO 1919, 이후 아닌 이전 100년 살펴야
2. ILO 협약이 제기하는 노동의 근본 문제
3. 강제노동 협약(29호와 105호) 제정의 역사
4.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협약(87호와 98호)의 역사
5. 민주공화국, 선 입법과 국회 동의 논란을 넘어

 

국제노동기구(ILO)는 세계 전쟁과 러시아 혁명의 산물이다. 제국주의 전쟁을 억제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예방할 목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19년 출범했다. 수천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1차 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열강들은 두 가지 상반된 길로 나아갔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말 볼셰비키가 이끈 혁명이 일어나 사회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공산주의 파도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을 휩쓸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은 제국주의 질서와 자본주의 체제를 개선할 필요를 느꼈다.

전쟁과 혁명의 예방, ILO의 탄생

전후 세계 질서를 설계하려 세계 열강 지도자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 이탈리아 수상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가 '빅포(Big Four)'로 불리며 강화회의를 이끌었다. 아시아 강국으로 떠오르던 일본도 영국 지원 아래 5명의 대표단을 보냈다. 당시 파리는 혼란스러웠다. 퇴역 군인들이 거리에서 군복을 입고 구걸을 했다. 좌익은 혁명을, 우익은 탄압을 외쳤다. 파업과 시위가 줄을 이었다.

파리강화회의가 설치한 노동위원회는 1919년 1~4월 ILO 밑그림을 그렸다. 미국노동연맹(AFL) 위원장 사무엘 곰퍼스가 의장을 맡았다. 위원회는 벨기에·쿠바·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이탈리아·일본·폴란드·영국·미국 등 아홉개 나라로 이뤄졌다. 각국 노사정 대표자를 한데 모아 3자 기구를 만드는 방안이 마련됐다. 국제 노사정 3자 기구에서 모든 나라와 공장에 적용되는 국제노동법을 만드는 목표를 실천할 조직으로 ILO를 만드는 데 합의한 것이다. 노사정 3자주의를 명시한 ILO 헌장은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이 주도해 만들었다. 헌장에는 1901년 스위스 바젤에서 출범한 국제노동법협회에서 나온 논의들이 반영됐다. 조선에서는 민중의 유혈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

노동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미 19세기에 제시됐다. ILO는 자신의 탄생 및 헌장 제정과 관련해 두 명의 역사적 인물을 호명하고 있다. 영국 산업가 로버트 오언(1771~1858)과 스위스 산업가 다니엘 르그랑(1783~1859)이다. 이십대 초반부터 경영자로서 실력을 쌓은 오언은 계몽주의 개혁사상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는 공장 노동자들의 건강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오언이 세운 공장에는 노동자와 그 가족, 인근 도시에서 데려온 고아까지 2천 명이 모여들었다. 1810년 일하는 시간으로 하루 10시간을 주장했던 오언은 1817년 8시간을 내세웠다. 이를 계기로 오언은 노동운동가로 변신했다. 1834년 영국 최초의 노동운동 전국조직인 전국노동조합대연합 건설에 깊이 관여했다. 1813년에 쓴 <새로운 사회관>에서 오언은 노동자보호법·아동노동 금지법·빈민구호법을 제안했다. 사회복지의 역사에서 그는 어린이집 창시자이자 생활공간 설계와 도시계획의 주창자로 기억된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르그랑은 소득 절반은 하느님을 위해, 나머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르그랑은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노동조건과 더불어 주거와 교육을 제공하려고 애썼다. 당시 노동력의 주축을 이뤘던 아동들의 일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법률 개정을 청원하기도 했다. 그는 부모와 자녀가 같이 일하는 가족 단위 소규모 공장을 이상적인 경제체제로 봤다. 가족 간 유대를 토대로 한 경제활동이 장기적으로 사회에 혜택이 된다고 믿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르그랑은 말년에 노동 착취를 규제하는 국제법 체계를 구상했다. 이 꿈은 그가 죽고 60년이 흘러 인류가 세계 전쟁과 공산 혁명을 겪고 난 1919년 ILO 출범으로 이뤄진다.

'일하는 계급'의 개선과 해방

ILO 첫 총회는 1919년 10월29일부터 11월29일까지 한 달 동안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열렸다. 일하는 시간, 밤일(night work)의 억제, 여성과 어린이 보호, 실업자 구제에 관한 6개 협약이 만들어졌다. 역사적인 1호 협약은 일의 시간(hour of work)을 하루 8시간, 주 48시간으로 규제하는 것이었다. 오언의 100년 전 꿈이 국제사회 상식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사실 8시간 운동에서 오언은 상징적 인물에 불과했다. 8시간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착취로 임금 노예(wage slavery)가 만연했던 19세기에 국가와 자본이 합작한 유혈 폭력을 뚫고 등장한 노동운동의 염원이었다. 저임금과 열악한 공장 상태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폭력과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일하는 시간과 조건을 규율하는 공장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1802년 어린이의 일이 아침 6시 이후 시작해 저녁 9시 이전에 끝나야 하며, 하루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공장법이 제정됐다. 1847년에는 어린이와 여성의 일을 하루 10시간과 주 58시간으로 제한하는 공장법이 만들어졌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앞장선 폭력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정부는 성인남자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루 12시간제를 도입했다. 1866년 카를 마르크스가 주도했던 국제노동자협회는 '임시총회 대의원을 위한 지침'을 내고 8시간과 밤일(night work)의 폐지를 정식 요구로 채택했다.

"일하는 시간의 제한은 (일하는 계급의 상태 개선과 해방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이것이 없다면 개선과 해방을 향한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일하는 계급의 건강과 신체적 에너지, 즉 모든 나라의 위대한 육체를 위해, 또한 노동자들의 지적 개발·사회적 소통·사회 정치적 행동을 위한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일하는 시간의 제한은 필요하다. 우리는 하루 일의 법적 제한을 8시간으로 제안한다. (중략) 향후 추세는 모든 밤일(night work)을 금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루 8시간을 가장 먼저 쟁취한 나라는 호주다. 석공들을 중심으로 한 건설노동자들이 앞장섰다. 1858년 호주 건설업에 8시간제가 도입됐고, 1860년대와 1870년대를 거치면서 빅토리아주 전체로 확산됐다. 1916년 빅토리아 주정부는 '빅토리아 8시간법'을 통과시켜 주의 모든 노동자에게 하루 8시간을 보장했다. 호주 연방정부는 1920년대에 8시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연방중재법원 결정으로 1948년 1월1일 주 5일 40시간제가 호주 전역에 도입됐다. 8시간을 세계적 표준으로 만드는 데 쐐기를 박은 나라는 러시아다. 1917년 10월 혁명이 성공한 직후 레닌이 이끈 소비에트 정부는 8시간 법령을 선포했다.

1919 파리, 1919 상하이, 2019 대한민국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는 1919년 ILO 헌장의 정신은 조선 해방과 독립을 꿈꾸던 민족해방 투사들의 염원이었다. 전쟁의 참화와 혁명의 소용돌이를 사회정의와 노동존중으로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ILO 100년과 대한민국 100년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우리가 비준하려는 ILO 기본협약 29호(1930년)·87호(1948년)·98호(1949년)·105호(1957년)는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제정 연도에서 알 수 있듯이,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참화를 겪으며 수천만명을 살상하면서 얻어 낸 인간의 지혜를 모은 것들이다. 국가가 시민사회에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 자본가에 의한 부당노동행위 금지를 뜻하는 단체교섭권, 국가에 의한 강제노동 폐지는 제국주의와 세계 전쟁, 한국 전쟁, 파시즘 체제, 과격한 경제발전, 격렬한 민주화투쟁을 맨몸으로 헤쳐 온 한국 민중들이 수립하려는 민주주의와 평화체제의 기초가 되는 것들이다. 21세기적 가치가 아니라 100년 전 민주공화정을 꿈꿨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의 재확인이다. ILO 기본협약 비준은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제국주의, 미국의 군사적 점령, 군사 독재가 남긴 전체주의와 국가주의 잔재를 일소하고 1919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바랐던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1919년 봄 프랑스 파리, 국제연맹과 ILO의 탄생을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던 서른 여덟의 청년 김규식(1881~1950)도 있었다. 이렇게 ILO 협약은 1919년의 파리와 상하이와 조선, 그리고 2019년의 대한민국을 가로지르며 우리 노동자 민중의 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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