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이용 검거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1년 11월28일자.

우리나라에는 대를 이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 분투한 집안이 많다. 그중에서 김구 선생의 큰아들 김인은 아버지를 도와 임시정부 산하 대한독립군 감독관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코앞에 둔 1945년 3월29일 폐렴으로 병사했다. 1907년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고발하려다 뜻을 못 이루고 자결한 이준 열사의 외동아들 이용은 어떻게 살다가 갔을까. 그는 총을 잡고 아버지 이준의 뜻을 이어 독립투쟁에 헌신하다 광복 후 이북 정부의 고위직을 지냈다.

김구 집안은 광복까지 아버지가 살아남고 아들이 먼저 죽었는데 통일정부를 지향한 아버지조차 단독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라면, 이준 집안은 일찍이 아버지가 조선독립을 외치며 자결하고 아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광복 후 이북의 고위직을 지낸 경우다. 대한제국 관료로서 경술국치 치욕에 자결로 맞선 홍범식과 그의 아들 홍명희도 비슷한 경우다. 항일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 출신 독립운동가 김형직 집안도 그렇다. 30대 젊은 아버지 김형직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 김성주(김일성)는 총을 잡고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준 열사의 아들, 무장의 길로

이용(李鏞, 1888년 4월7일~1954년 8월18일)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이준(李儁)과 첫 부인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종승(李鐘乘)이다. 일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용으로 개명했고 이객우(李客雨)란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는데, 부친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를 중퇴했다. 일제의 폭압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11년 8월 중국 동북지방으로 가서 조선동포자치회 성격의 ‘간민회’ 총무를 보다가 중국 절강성 절강체육학교를 거쳐 1918년 절강성 육군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절강성 육군 8연대 소위로 복무했다. 조선 독립을 향한 이준 열사의 결 곧은 의지와 신념이 그의 아들 이용으로 하여금 항일무장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이용은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에서 열린 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의 군사부 담당 중앙위원으로 일했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20년 5월 동로(東路) 사령관으로 임명돼 북간도에서 반일무장부대 통합을, 안도현 명월구에서 대한국민회 산하 사관학교 건립을 준비했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마적과 결탁해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빌미로 엄청난 병력을 파견해 대토벌전·대학살극을 전개하던 1920년 말 러시아령으로 넘어갔다. 이때 독립군 각 부대들도 후퇴해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인 밀산에 집결해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하고 러시아 영내 자유시를 만주항일무장투쟁 근거지로 삼으려고 이동했다.

이 과정에 이용은 1921년 1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로부터 전한임시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됐다. 3월 아무르주 마사노프시에서 노령과 만주의 한인 무장부대를 결집해 개최된 전한의병의회에서 대한의용군 군사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그해 6월 일제하 독립운동사의 최대 비극이 발생했다.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에서 러시아 적군의 무기와 지휘권 회수에 대한 이견 충돌이 야기한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이 벌어진 것이다. 이용 장군은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가까운 관계로 분류됐는지 러시아 적군에 붙잡혀 7월 이르쿠츠크로 압송되는 도중에 탈출해 극동공화국과 일본 간섭군 사이의 중립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지방으로 피했다.

자유시 참변 상처에도 무장투쟁과 단결촉진 기여

자유시 참변으로 인한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이용 장군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21년 10월 이만에서 군비단(軍備團) 군대를 주축으로 대한의용군과 전한군사위원회를 재건하고 대한의용군 사령관이 됐다. 11월 말 우수리 철교 이남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 반혁명세력, 몰차노프 백위군(白衛軍)이 하바롭스크를 점령하기 위해 중립지대를 넘어 북상하자 대한의용군을 거느리고 극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과 협력해 백위군과 싸웠다. 1921년 11월 말부터 이듬해 2월에 걸쳐 이만철교 전투·노치거우 전투·울라지미로프스카 전투·인 전투·올리고크트 전투·볼로차예프스크 전투 등에 참전했다. 1922년 9월 한인 무장부대의 통일기관인 고려혁명군정청 설립 당시 고려혁명군 연해주 총지부 북부사령관으로 지명됐다.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해 분열·갈등을 해소하고 통일·단결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22년 이후 시베리아내전이 끝난 뒤 소련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던 이용은 1925년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중국 광동 혁명근거지로 가서 손문 선생이 주도하는 국민혁명군 산두(汕頭) 주둔 포병연대에서 근무했다.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주임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의 교관 출신인 오성륜·최용건 등과 함께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의 반공쿠데타에 반대해 싸웠다. 그해 12월 광주꼬뮨 당시 봉기군 교도단 제1영 군사고문으로, 봉기 실패 후 해륙풍(海陸豊) 근거지 건설에 정열적으로 참여했다.

광주꼬뮨 이어 조국광복회 동참

이용은 1930년 만주로 가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에 가입하고 1국1당 원칙에 따라 중공당으로 옮겨 연변특별지구 위원으로서 ‘간도 5·30 봉기’와 그 후의 반일농민운동에 참가해 적색유격대·자위대 결성에 노력했다.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중공당 동만특위 통신연락부장을 맡았는데, 11월 조양천(朝陽川)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고향 북청에 거주제한 조치를 받는다.

그래도 이용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6년 11월 북청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도하는 조국광복회에 들어가 지하활동을 시작했고 김일성부대의 정치공작원 김정숙을 비밀리에 만나 무장투쟁을 지원하고 전민항쟁을 준비했다. 1944년 11월 장춘에서 비밀리에 동북인민해방정치위원회를 결성하고 일본군 군사시설 정찰활동에 참가하면서 광복을 맞았는데, 그런 연계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분단 극복 노력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해방 후 이용은 1946년까지 북청군 초대인민위원장을 지내다가 그해 3월에 월남해 만 2년여 서울에서 활동했다. 왜 남하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1946년 6월 이극로와 함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1947년 신진당(新進黨) 부당수로 일하다가 1948년 4월 다시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올라갔다. 이것으로 볼 때 혹시 남쪽에서 우파까지 망라한 통일정부 지향의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서울에 온 것은 아닌지 추측할 뿐이다.

그 후 그는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첫 내각 도시경영상, 1951년 12월 사법상, 1953년 무임소상을 차례로 맡아 일하다가 1954년 8월18일 병으로 사망했다. 1990년 조국통일상을 받고, 현재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고 한다. 물론 남쪽 보훈처에서는 북쪽 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이용을 서훈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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