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총회가 6월10일부터 21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다. 이번주는 ILO 기본협약 비준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시기다. ILO 협약 189개 가운데 한국 정부가 비준한 협약은 29개에 불과하다. ILO 모든 회원국이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기본협약은 8개 중 4개만 비준한 상태다. 촛불시민 지지를 받고 노동존중 사회를 약속하며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비준한 ILO 기본협약은 전무하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 윤효원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가 ILO 탄생과 협약 제정을 둘러싼 역사를 살펴보고 비준 방향을 모색하는 글을 보내왔다. 5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글 싣는 순서]

1. ILO 1919, 이후 아닌 이전 100년 살펴야
2. ILO 협약이 제기하는 노동의 근본 문제
3. 강제노동 협약(29호와 105호) 제정의 역사
4.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협약(87호와 98호)의 역사
5. 민주공화국, 선 입법과 국회 동의 논란을 넘어


 

개인이 개인에게 강제노동을 강요하면 범죄가 되듯 국가가 개인에게 강제노동을 강요하면 범죄라는 게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정한 29호(1930년)와 105호(1957년) 협약의 요체다. 앞 글에서 살펴봤듯 강제노동 폐지는 제국주의 식민지 국가의 노예노동을 자유임금노동으로 바꾸는 것이며 파시즘 국가의 정치적 탄압과 노동력 동원을 억제하는 것이다. 국가에 의한 노동력 동원은 조선왕조 시절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됐고 일제 통치기에는 국가총동원체제라는 미명하에 자행됐다. 한국전쟁과 파시즘 정권을 거치면서 국가의 당연한 권리이자 국민의 거부할 수 없는 의무라는 국민총화이념으로 승격돼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전쟁의 경험과 분단을 빌미로 국가에 의한 노동력 동원 이데올로기가 우리 내면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현실이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부르면 무조건 응답해야 한다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 세계관이 만연해 있다. "(국가가 타종하는) 새벽종이 울리면" "너도나도 일어나"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들어야 하는" 국가총동원과 근로보국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ILO 협약 훼방 놓는 '조선총독부'의 후예들

강제노동이 국가가 개인에게 저질러서는 안 되는 국가폭력의 문제라면, ILO 협약 87호(1948년)가 말하는 결사의 자유는 국가가 시민사회에 저질러서는 안 되는 국가폭력의 문제다. 이 협약에 따르면 국가는 노사단체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거나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의무이행의 주체는 국가이고 권리향유의 주체는 노사단체다. 이런 점에서 87호 협약이 말하는 결사의 자유는 노동권이나 사회권이 아니라 시민권이며 자유권이다.

아래 표에서 보듯 강제노동 협약과 관련한 의무를 이행할 주체는 국가다. 그 권리를 향유할 주체는 개인과 시민사회다.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도 마찬가지다. 협약 98호(1949년)가 말하는 단체교섭권과 관련해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영역도 국가가 사용자로 있는 공무원부문이다. ILO 기본협약 비준 문제의 당사자는 노동자와 사용자(노사)가 아니라 국가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기본협약 비준에 앞장서기는커녕 비겁하게도 노사 간의 사회적 대화라는 미명하에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뒤로 숨어 버렸다. 경사노위 논의에서 협약 비준을 위한 정부의 입장과 계획은 전혀 밝히지 않고, 노사 간 협의도 어려운 문제를 두고 노사 간 합의를 종용하며 직무를 유기했다.

ILO 기본협약 문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경사노위는 노사정이 주체임에도 전원 법기술자로 구성된 '공익'(?) 위원들이 앞장서 합의안을 만들도록 허용했고, 이게 무슨 대단한 내용이라도 되는 양 부풀려 공익위원안이 경사노위안으로 내세워지는 형국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ILO 협약 비준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의미에 대한 무지로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사노위가 어리석게도 사회적 대화의 기반을 허무는 데 앞장선 것이다. 이런 사정을 경사노위가 몰랐다면 희극이요 알았다면 비극이다. 이 무대 뒤에는 일본 군국주의와 군사 파시즘 체제의 유지를 꿈꾸며 노동자의 해방과 독립을 부정할 의도를 갖고 ILO 기본협약 비준을 방해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관료'들이 똬리 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이 아니라 '조합'에 방점

87호 협약에서 말하는 결사의 자유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여기서 말하는 '결사(association)'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87호에는 우리말로 노동조합으로 해석되는 'trade union'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ILO 협약은 사용자단체(employers' organisations)와 노동자단체(workers' organisations)라는 말로 일관한다. trade union에서 말하는 trade는 직업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노동조합으로 해석하는 trade union은 직업조합으로 봐야 본뜻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노동조합이라 하지 않고 직업동맹이라 한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같은 조직으로 모이라는 것이다. 이게 19세기 말과 20세기를 거치면서 산업별조합으로 확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연히 의사협회·변호사협회·회계사협회·약사협회·세무사협회도 trade union의 범주에 속한다. trade union이라는 말이 갖는 이러한 의미를 고려할 때 결사의 자유와 관련해 노동조합이란 말의 방점은 '노동'이 아니라 '조합'에 찍힌다. 국가가 의사나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장하는 동일한 수준의 결사의 자유를 노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보장할 의사가 있느냐가 87호 협약 비준의 핵심 문제인 것이다.

87호 협약은 사용자들도 결사의 자유를 누린다고 명시한다. 국가의 개입 없이 사용자단체를 결성하고 운영할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용자단체로는 한국경총과 전경련이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읽어 보면 노동자들의 결사체인 노동조합의 결성을 지원하고 활동을 증진하는 내용보다 그 반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노동자단체의 결성과 운영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사용자단체를 규제하는 법은 따로 없는데, 노동자단체를 규제하는 법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선 입법 완료된 98호 단체교섭권 협약

사용자단체 회원과 임원 자격을 규제하는 법령은 따로 없고, 사용자단체 상근자 급여를 규율하는 법령도 따로 없다. 반면 노동자단체의 회원과 임원 자격을 규제하고 노동조합 상근자 급여를 억압하는 법령은 있다. 사용자단체에게는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가 노동자단체에 대해서는 그 자유를 구속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화해 건강한 노사관계를 위한 평평한 운동장(a level playing field)을 만들자는 약속의 출발점이 87호 협약 비준이다.

단체교섭권 협약으로 알려진 98호(1949년)에 단체교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교섭할지는 노사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취지다. 98호 협약은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용자의 의무로서 반노조 차별행위(acts of anti-union discrimination)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 노조법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조항과 대동소이하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정부는 노조전임자 지급은 노사 자율로 결정하라는 취지의 135호 노동자대표 보호 및 편의제공 협약(1971년)을 2001년 12월 비준했다. 사실상 98호 협약과 관련한 국내 법령 입법은 이미 완성돼 있다. '조선총독부'의 관료들과 그 부역자들이 주장하는 선 입법 논리에 따르더라도 98호 협약은 당장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비준할 수 있으며, 국회 동의도 필요 없다.

국회에 비준 동의를 구한다? 관료들의 꼼수

이 글을 쓰는 시각, 고용노동부 장관이 29호·87호·98호에 대한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던지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수차례 밝혔듯이 '국회 동의'는 '선 입법'론의 재판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미 국회 동의를 받아 비준한 수많은 국제조약들과 우리나라 최고법인 헌법과 하위법령들을 볼 때 법률 완성도와 충족률에서 기본협약과 관련한 입법은 이미 완료됐다. 관행적으로도 국가폭력을 금지하고 국민 개인과 시민사회에 자유와 자율성을 부여하는 국제법과 국내법에 대해 국회는 반복적으로 동의를 표명했다. 협약 내용과 충돌하는 일부 법령은 대통령 비준 이후 정부 입법으로 노사 협의를 거쳐 개정 절차를 밟으면 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10월 정기국회에 비준동의안을 던지고 동시에 경사노위 공익위원안을 중심으로 국회에 입법 요청을 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비준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그 목적은 관련 법령 개혁의 완성을 가로막겠다는 것이다. 비준을 갈망하는 대통령의 선의는 인정하지만 그 방향성과 방법론은 '조선총독부' 후예들이 쳐 놓은 덫에 걸려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상하건대 내년 총선까지 협약 정신에 맞는 방향으로의 입법은커녕 국회의 비준 동의도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민주공화국을 향한 여정은 그만큼 지체될 것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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