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12년 전, 그리고 9년 전. 두 번의 뉴질랜드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 한숨의 주저함도 없이 ‘카이코우라’를 꼽는다. 남섬의 중심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차를 타고 두 시간 반이면 닿는 곳. 입구에서부터 걸어도 채 10분이 되지 않아 빠져나갈 수 있는 시내를 지나면 카이코우라 반도가 바다 한가운데로 머리를 쑤욱 내밀고 있다. 반도의 한쪽 끝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갈지자로 난 오르막을 5분쯤 오르면 나타나는 언덕 위 산책길. 짠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곳이 바로 12년 전 그날, 그리고 9년 전 그날, 평생 써먹지도 못하고 죽일 뻔했던 내 여행세포를 깨워 준 인생의 선물 같은 길이다.

길의 오른쪽은 윈도우 바탕화면이다. 멀리 눈 쌓인 남섬의 산맥들이 병풍을 쳐 주고, 그 앞으로는 넓은 초원 위에서 소 몇 마리가 인간 관광객 따위에는 1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풀을 뜯고, 되새김을 하고 똥을 눈다. 카메라를 어느 쪽으로 들이대도 그냥 윈도우 바탕화면 사진이 되는 곳이다. 능선의 왼쪽은 30미터 정도 되는 해안 절벽. 해안선을 따라 투명하게 푸른 바다가 검붉은 해초 줄기와 뒤섞인 채 파도를 따라 출렁인다. 바다가 절벽을 파고들어 만든 둥근 해변 쪽은 마치 석회 가루라도 뿌려 놓은 듯 하얗디하얀 자갈 모래와 이 모래들이 부서져 나온 넓적한 바위들이 바다와 절벽의 경계를 만들고 있다. 멀리서는 그저 넓적해 보이는 이 바위들은 다가가면 파충류의 건조한 껍질 위로 벗겨져 나오고 있는 각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반대로 절벽이 바다를 밀어붙인 곳에는 하얀 바위들이 날카롭게 솟아오른 모습이다. 그 솟은 바위들 위를 바다 갈매기와 가마우지가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 자신들만의 도시 ‘버드 시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절벽 위를 걸어가며 바다쪽을 바라보다 보면 널찍한 바위 위 이곳저곳에 박혀 있는 검은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점들이 문득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헛것을 봤나 싶어 가던 길을 멈추고, 눈을 잔뜩 비빈 뒤, 실눈을 떠 초점을 좀 더 예리하게 맞춰 본다.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며 놀라고 만다. ‘어라! 설마 저 점들이 전부 물개?’ 물개 맞다. 얘네들은 사람들이 곁을 지나다니며 쉴 새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도 아랑곳없이 늘어져서 낮잠을 즐긴다. 여기서 한술 더 뜬 일부 관종 물개들은 몸을 곧추세워 이리저리 인간들을 위한 사진빨을 세워 주기도 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어떤 경계나 긴장감도 느낄 수 없는 장면이 바닷가를 따라 쭈욱 펼쳐지는 중이다. 세상의 어느 동물원에서도 느낄 수 없는 모두를 위한 자유와 존중, 그 공존의 맛! 카이코우라가 주는 큰 선물 중 하나다.

그렇게 또 몇 분을 걷다 물 한 모금 마시겠다는 핑계를 대며 길옆으로 살짝 비켜 나와 아무렇게나 엉덩이를 깐다. 엉덩이를 깔고 낮은 덤불 속에 반쯤 몸이 가려진 채 바다와 절벽과 하늘과 초원과 설산을 조용히 둘러본다. 부지런히 발을 놀리고, 고개를 돌려가며 바라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문득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인간이 아니라 이곳 풀숲에 사는 조그만 초식동물이 된 듯한 낯선 느낌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기분이 좋다. 비로소 지구라는 거대한 행성의 존재를 느낀 각성한 생명체가 된 신비스러운 기운마저 느껴진다. 12년 전에도, 9년 전에도 느꼈던 그 기운이 지금에 와서도 생생하다. 그때 아마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이런 지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세찬 바람 때문인지, 지치도록 따가운 햇살 때문인지, 갱년기 감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도 같다. 여기서 더 나가면 궁상떠는 일이 될 것 같아 엉덩이를 추켜세운다.

두어 시간의 산책을 마치고 나면 동네 식당을 찾아 허해진 속을 달래 주는 게 이런 좋은 곳을 내어 준 지역주민들에 대한 여행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허기가 급한 사람이라면 산책로 주차장에서 조금만 차를 타고 나오면 만날 수 있는 “원조 카이코우라 시푸드”라는 간판이 붙은 노점에서 해산물 모듬이나 크레이피시(이 동네 바닷가재 이름) 한 마리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크레이피시 가성비는 확실히 높다. 마을 입구에 있는 ‘쿠퍼스 캐치’라는 피시앤칩스 가게는 이 동네에서 소문난 맛집이다. 동네 어부 쿠퍼 아저씨가 매일 잡은 싱싱한 생선으로 튀겨 주는 생선튀김이라는 설이 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피시앤칩스 한 조각 입에 물고 불타오르는 카이코우라의 석양을 바라보는 맛이 음식 맛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카이코우라 역시 뉴질랜드 남섬을 휩쓴 대지진의 재앙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11년 대지진에 이어, 2016년에도 카이코우라 근처에서 제법 큰 지진이 일어나 이곳으로 오는 해안도로가 피해를 많이 입은 모양이었다. 오는 길 내내 공사로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때 반도의 지형도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카이코우라는 여전히 여행자들의 내면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힘을 품고 있었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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