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마음쓰담 구성원들. 왼쪽부터 임갑임 상담심리사, 양선희 부센터장, 김미연 팀장, 류연이 상담심리사.<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마음에 난 상처, 트라우마. 몸에 난 상처는 약이라도 바를 수 있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보이지 않기에 더 아프다. 일터에서 사고로 죽거나 다치는 동료들을 목격한 노동자들도 아픔을 겪는다.

산업재해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노동자들의 상처 난 마음에 연고를 발라 주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돕는 곳이 있다. 대구 달서구 성서공단에 위치한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마음쓰담'이다. 노동자 산재트라우마를 관리하는 전국에 단 하나뿐인 전문상담센터다.

<매일노동뉴스>가 전국 사업장으로 '찾아가는 상담'을 하는 상담심리사들을 만났다. 워낙 전국을 누비는 터라 심리사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센터를 방문하고 인터뷰를 하며 7일과 9일, 21일 세 차례에 걸쳐 취재했다.

전국에 단 한 곳
상담사 3명이 전국 돌며 '찾아가는 상담'


마음쓰담에는 3명의 상담심리사가 있다. 애초 대구에 가면 이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을 활동 반경으로 움직이는 상담심리사들의 동선을 제대로 몰랐던 탓이다.

김미연 팀장은 지난 7일 인천 동구에서 만났다. 3월 말 폭발사고로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제조업체 노동자·관리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진행한 날이었다.

김 팀장의 차 안에는 뜯지 않은 삼각김밥이 있었다. 장거리 출장이 많아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다고 했다. 그는 "이틀 뒤에는 포항에 가야 한다"며 "대한민국이 산재가 정말 많이 일어나는 나라라는 걸 새삼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전문상담센터 시범운영이 시작된 지난해 5월부터 전국을 다니고 있다. 대전 H사업장 화재 폭발사고, 인천 S사업장 화재사고, 거제 S사업장 자살사고, 제주도 S사업장 끼임사고를 비롯해 지난해 말까지 전국에서 발생한 26건의 산재사고를 겪거나 목격한 노동자들의 트라우마 상담을 했다.

물론 산재가 일어난 모든 사업장을 다 찾지는 못한다. 인력의 한계 때문이다. 올해 한 명의 상담사가 충원돼 3명이 됐지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개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인력이다. 김 팀장은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산재가 많이 발생한 사업장이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을 위주로 트라우마 상담을 하고 있다"며 "일단 첫발을 뗐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산재트라우마, 그게 뭔데?"
상담 권유했다가 '보따리 장수' 취급도


매년 9만명가량의 노동자가 일하다 다치거나 사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산재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된 2차 피해자(동료·관리자)들은 한 해 적어도 수십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지만, 심리적 외상을 묵혀 두면 우울·불안·자살·실업 등 사회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트라우마 관리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지금까지 산재 2차 피해자들은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들이 겪는 심리적 외상이 어떤지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저 혼자서 감당해야 할 상처 정도로 여겨졌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은 "유난을 떤다"는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다.

산재트라우마가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은 31명의 사상자를 낸 2017년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부터다. 사고 당일 출근한 노동자만 1천623명, 사고현장을 목격한 노동자가 최소 300명인 '사업장 재난'이 터지자 정부가 산재트라우마를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삼성중공업 사고를 계기로 안전보건공단은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대구근로자건강센터에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사업을 위탁해 시범운영했다.

시범운영이었지만 산재트라우마를 보는 사업장 임직원의 생각을 바꾸는 데 힘이 됐다. 정부가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에 트라우마 상담을 권고하는 절차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대구근로자건강센터에서 직무스트레스와 관련한 심리상담을 했던 시절에도 김미연 팀장은 산재 사업장에서 트라우마 상담을 했다. 영업사원이 영업을 뛰듯 몸으로 부딪쳤지만 여의치 않았다.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에 전화를 걸어 "트라우마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뭘 한다고요?" 아니면 "그게 뭔데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문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거 필요없다"며 냉정하게 전화를 끊는 경우도 허다했다.

"처음에는 잡상인이나 보따리 장수 취급을 받았어요. '트라우마가 뭐냐'고 묻는 사람은 양반이죠. '돈을 얼마나 받기에 이런 일을 하고 다니냐'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그래도 그때는 100명 중 99명이 괜찮고 1명이 아프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뛰어다녔어요."

지금은 고용노동부·안전보건공단이 사고 발생 사업장에 트라우마 상담권고 공문을 보내면서 상담사들이 개입하기가 수월해졌다. 근로감독관들의 인식도 높아져 사업장 담당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트라우마 상담을 꼭 하라"고 하거나 사업장에 동행해 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불안·우울·분노·불면 …
"정상반응이라는 사실 알려만 줘도 호전"


일터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노동자들은 사고 당시 꿈을 반복해서 꾸거나 갑자기 생각나 몸서리치는 경험을 한다고 했다. 전화벨 소리나 문 닫히는 소리에도 소스라친다. 화재나 폭발 현장을 경험한 노동자는 밥솥에서 김이 피어나는 것만 봐도 놀란다. 잠들기 어렵고 밥을 먹기도 힘들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한다. 술·쇼핑·게임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사건을 떠올리기 싫어 다른 데 몰두하는 것이다. 이른바 회피반응이다. 이런 증상들이 한 달 넘게 지속된다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산재트라우마 상담은 노동자들이 트라우마 증상을 조기에 극복하고 심리적 안정을 찾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노동자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까지 악화하지 않도록 막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상담심리사들의 조기 개입이 중요한 이유다.

노동부는 매뉴얼에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가 고착화하기 전인 재해 발생 후 7일 이내 긴급대응기에 상담하는 것을 정석으로 보지만 현실에서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 양선희 전문상담센터 부센터장은 "사고가 터지면 경찰·국립과학수사연구원·노동부·안전보건공단이 조사를 마친 뒤에나 우리에게 연결이 된다"며 "현재 절차로는 매뉴얼상 '긴급대응기'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양 부센터장은 "지금은 초·중기(재해 발생 후 7일~3개월) 대응에 주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재트라우마 상담은 전문교육, 1차 상담, 2차 상담 3단계로 진행된다. 교육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사건·사고를 겪은 뒤 나타나는 불면증·불안감·분노·우울·무기력·식욕부진 같은 증상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노동자들은 어디까지가 정상반응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안도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예민할까'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날까' 혼란스러워하다 원인을 알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납득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류연이 상담심리사의 말이다.

1차 상담에서는 사건충격 척도검사를 한다. 재해자가 받은 충격 정도를 파악하는 단계다. 보통 20여개 문항으로 구성되는 사건충격 척도검사 결과 17점 이하는 정상, 17~24점은 부분외상(위험군), 25점 이상은 완전외상(고위험군)으로 구분된다. 충격 정도에 따라 1차 상담으로 끝낼지, 2차 상담을 할지 결정한다. 보통 2차 상담까지 마치면 공식 절차는 끝나지만, 충격이 지속되거나 고위험군일 경우는 정신과 전문치료를 연계하기도 한다.

류 상담심리사는 "복합외상 경험을 가진 노동자들을 적지 않게 만난다"고 전했다.

"폭발사고가 일어난 공장에서 사고 당일 근무를 하지 않은 노동자가 굉장히 괴로워하셨어요. 자기는 그날 공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괴로운지 모르겠다고 혼란스러워했는데, 알고 보니 과거 다른 공장에서 기계 폭발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었던 거예요. 당시 폭발사고로 공장 안이 정전되면서 암흑 속에서 탈출했던 기억이 이 사고를 계기로 확 떠오르면서 가슴이 두근대고 몸이 긴장하는 증세로 나타난 겁니다. 복합외상 경험자였던 거죠."

 

▲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왜 아직도 힘들어해?"
말 한마디에 움츠러드는 노동자들, 동료·가족 지지 중요


노동자들이 상담을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상담해서 뭐하냐"거나 "이제 겨우 극복했는데, 왜 또 생각나게 하느냐"며 상담을 거부하거나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노동자들도 있다. 회사 눈치를 보느라 상담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그날의 기억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크다고 한다.

류연이 상담심리사는 "산재트라우마 상담과 일반 상담이 달라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일반 상담은 과거 발달력에 따라 개인이 안고 있는 상처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기 위해 깊숙한 대화를 나눈다면, 산재트라우마 상담에서는 내담자에게 사건에 대해 묻지 않는다. 사고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 증세가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사들은 사건 개요를 미리 숙지하고 상담 과정에서는 관련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산재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들이 사건 이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손잡아 주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이분들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애쓰고 있는 상태예요. 트라우마를 이겨 내기 위해 새롭게 무엇이든 하려고 노력하지 마라고 합니다. 사람들과 지내는 게 불편하다고 하면 억지로 어울리지 마라고 하고, 안 하던 운동을 무리하게 하지 마라고 하죠. 간혹 빠르게 심리적 안정을 찾는 분들도 만나는데, 이런 분들에게는 '당신의 이런 점 때문에 회복이 빠르다'고 격려하는 게 필요합니다."

산재트라우마 극복을 위해서는 전문기관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동료나 가족의 지지도 중요하다. 양선희 부센터장은 "상담사들이 노동자들과 계속 함께 있어 줄 수 없기 때문에 동료의 지지기반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며 "서로서로 누가 힘든지, 문제는 없는지 살피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격려하고 보듬어 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왜 아직도 힘들어해?" "왜 저렇게 오버해서 자기 힘든 걸 얘기하지?" "너는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힘들어해?" 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2·3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임갑임 상담심리사는 "산재트라우마 예방을 위해서는 사전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해가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언제든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해야 합니다. 산재트라우마 증세가 이렇고,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교육을 미리 받으면 실제 현실에 부딪쳤을 때 대처하기가 훨씬 수월하죠. 바이러스에 대항하도록 예방주사를 맞아 항체를 만들어 놓는 것처럼 말이죠."

여기저기서 산재 터지면 발만 '동동'
"최소 3곳 이상 센터 있어야"


상담심리사들은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가 전국에 최소 세 곳 이상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음쓰담에서 상담받은 노동자들에게 "상담을 받고 회복에 도움이 됐다"는 피드백을 받거나 하루에도 몇 건씩 산재사고 소식을 마주할 때마다 절실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안전보건공단은 올해 서울·부산·광주 세 곳에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를 직영으로 운영하기 위해 4억5천만원의 예산안을 마련했지만 기획재정부에서 전액 삭감됐다. 결국 공단 여러 예산항목에서 조금씩 떼어 대구근로자건강센터 위탁운영을 연장했다.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트라우마센터가 1년에 14억원의 예산을 가지고 정신과 전문의와 정신건강전문요원·연구원 등 26명의 인력을 둔 것과 비교하면 열악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에 배정된 예산은 2억원에 불과하다. 지난해보다 8천만원 증액된 금액이다.

공단 관계자는 "신규 예산을 요청하다 보니 재정당국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게 아닌가 싶다"며 "직영센터 운영을 위한 내년 예산을 다시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양선희 부센터장은 "거점별로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가 생긴다면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처럼 재난이 발생했을 때 조기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며 "산재트라우마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정부도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배혜정 기자

시범운영 꼬리표 뗐지만, 기재부 가위질에 정식사업 '불발'

상담심리사들 10개월 단기계약에 '고용불안'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는 커지고 있지만, 정작 이곳에서 일하는 상담심리사들의 고용은 불안하기만 하다.

올해 3월 채용된 류연이 상담심리사의 계약기간은 올해 12월까지다. 그의 근로계약 기간이 채 1년도 안 되는 이유는 전문상담센터가 10개월짜리 단기사업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12월14일 안전보건공단과 대구근로자건강센터 간 위탁운영 계약이 끝나면 류 상담사는 실업자 신세가 된다. 그는 "퇴직금도 받지 못하는 10개월 단기계약직이라 고용불안이 크다"고 토로했다. 류씨와 함께 올해 채용된 임갑임 상담심리사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는 "배운다는 자세로 왔지만, 계약기간과 임금 수준을 알고 놀랐다"고 귀띔했다.

대구근로자건강센터와 1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있는 김미연 팀장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위탁사업이 연장되지 않으면 근로자건강센터의 직무스트레스 상담심리사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12월 동료들이 계약기간 만료로 일을 그만두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다.

문제는 예산이다. 안전보건공단은 올해부터 직업적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를 서울·부산·광주 세 곳에 설치해 직영으로 운영하는 계획을 세우고 예산안을 마련했지만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전액 삭감하자 대구근로자건강센터 위탁운영을 연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시범운영' 꼬리표는 뗐지만 여전히 정식사업은 아닌 셈이다.

안전보건공단 관계자는 "사실 예산을 못 받았으면 사업을 접는 게 정상이지만 산재트라우마 상담을 받으려는 요구가 있기 때문에 공단 자체 예산을 끌어다가 사업을 만든 것"이라며 "현재 상담심리사들의 고용이 불안정한 것은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센터 직영운영이 필요하다"며 "내년 정부 예산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배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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