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걔들(사용자) 눈에 우리가 인간인가? 우리보다 싼 기계가 어디 있어? 사람보다 기계가 우선이지.”

영화 <파업전야>에서 동성금속 단조반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대학가에서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전투경찰과 싸워야 했던 엄혹한 시절이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고 많은 것이 변했다. 극장과 안방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자꾸만 의문이 든다. 30년이나 지났는데 왜 노동자 삶은 영화 속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지?

<파업전야> 제작을 맡았던 이은(58·사진) 명필름 대표는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자꾸 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지난 23일 오후 명필름아트센터가 있는 경기도 파주의 한 카페에서 <매일노동뉴스>가 이은 대표를 만나 ‘노동과 영화’에 대해 물었다.

- <파업전야>가 지난 5월1일 29년 만에 극장에서 개봉하며 화제를 모았다. 23일부터는 IPTV를 통해 안방에서도 <파업전야>를 볼 수 있게 됐는데 반응이 어떤가.
"처음 본 사람들도, 과거에 보고 모처럼 다시 본 사람들도 하나같이 놀란다. 어쩜 저렇게 30년 전과 상황이 똑같냐고. 지금 시대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지난 3주 동안 3천명 정도 관객이 영화를 봤다고 들었다."

사실주의 넘어 사실 그 자체
한국 최초 노동영화


<파업전야>는 영화제작집단 장산곶매가 만든 두 번째 작품이다. 1990년 세계노동절 101주년 기념으로 제작됐다. 1980년대 말 스패너 등 공구를 주조하는 동성금속 단조반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을 시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조반의 평범한 노동자, 주인공 '한수'는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처음에는 회사 편에 선다. 하지만 노조 결성을 시도한 노동자들이 용역경비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달라진다. 영화는 '한수'가 스패너를 높이 들자 눈치를 보던 다른 노동자들도 가세해 용역경비에게 돌진하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가 파업을 선동한다'고 판단한 노태우 정부는 영화 상영을 막았다. 전국 대학가와 공장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정문을 지키는 가운데 영화 상영회가 열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비공식적으로 30만명이 이 영화를 관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화인들은 <파업전야>를 89년 12월 당시 회사의 휴업 조치에 대항해 조업재개 투쟁을 하던 인천 남동공단 한독금속에서 노동자들과 합숙하며 촬영했다. 자본(상업영화)에 대항하는 취지에서 16밀리미터 필름으로 찍었다. 이 영화를 '한국영화 100선'에 꼽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지난해 리마스터링하면서 화질이 개선됐다. 덕분에 올해 5월1일 129주년 세계노동절을 맞아 29년 만에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 <오! 꿈의 나라>는 감독을 했는데 <파업전야>는 제작을 맡았다. 배경이 궁금하다.
“<오! 꿈의 나라>는 나와 장동홍·장윤현 세 명이 감독을 맡아 공동연출을 했다. 이어 <파업전야>를 만들기로 했는데 제작할 사람이 없었다. 이용배 선배(계원예술대 애니메이션학과 교수)와 함께 제작을 하게 됐다. 이 계기로 나는 평생 제작자로 살게 됐다. 직장 다니는 선후배들을 쫓아다니며 그날그날 찍은 <파업전야> 러시필름(원판)을 보여 주면서 투자를 설득했다. 30만~50만원씩 걷어서 1천만원 정도 모았는데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파업전야>가 없었다면 나한테 이렇게 뛰어난 제작자로서 능력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웃음)”

- 처음 만든 작품이 <공장의 불빛>이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노동현장 이야기를 다뤘다. 이유가 있나.
“대학 때 첫 과제(워크숍)로 만들었다. 제대하고 복학 전에 공장에서 잠깐 일한 경험을 가지고 찍은 영화다. 그때는 지식인들이 트렌드처럼 공장을 다녔고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 <파업전야>를 보면 실제 ‘공장밥’을 먹어 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대사나 상황들이 나온다. 어떻게 그렇게 사실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나.
“<파업전야>는 <오! 꿈의 나라>에 이어 장산곶매가 만든 두 번째 영화다. <오! 꿈의 나라>가 1980년 광주를 다뤘는데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이 혹독했다. 이번엔 정말 노동자가 공감할 수 있는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현장취재를 많이 했다. 현장 르포도 하고 실제 노동자들과 만나 이야기도 하고, 노동운동 하시는 분들에게 조언도 들으면서 시나리오 팀이 투자를 많이 했다. 촬영도 당시 휴업한 공장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에게 양해를 구해 찍었다. 실제 노동자들이 멈춘 기계를 돌리고 단역으로도 출연했다. 사실과 다를 바 없다. 지금 보면 어색한 곳도 많다. 뜨거운 쇳물을 스패너 주형 속에 넣고 망치로 두드리는데 배우가 엉뚱한 곳을 막 치는 장면이 나온다. 어휴~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파업전야2> 나올 가능성 있지만 …

- 재개봉한 <파업전야>를 보면서 지금도 다름없는 현실에 소름이 돋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자들이 '노조할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동성금속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주인공 '한수'가 노동운동을 계속했다면 지금의 이야기는 어떻게 쓰일까.
“질문 의도를 모르겠다. 글로벌 기업이 됐다면 한수가 노동귀족이 됐거나 소시민이 됐거나 그랬을 것이라는 말인가? 일단은 전제가 틀렸다. 동성금속은 글로벌 기업이 될 가능성이 없다. 스패너 만드는 회사여서 중국산 공구에 밀려 진작 없어졌을 테니까. 실제로 배경이 됐던 한독금속은 사라졌다. 회사가 업종 전환을 했거나 폐업하고 한수는 이직을 했으려나?”

- 리메이크나 <파업전야2> 제작 가능성이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생각을 안 해 봤다. 그런데 리메이크는 일단 아니다. 늘 그 다음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으니 <파업전야2>는 가능성이 있다. <파업전야>에 출연한 배우들이 그 이후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왠지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만나는 것도 두려웠다. 이번에 극장에서 개봉하면서 오랜만에 배우들을 만났는데 <파업전야> 재개봉을 누구보다 흐뭇해했다. 누군가 농담 삼아 이제 <파업전야2>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기분이 좋았다. 혹시 누군가 시나리오를 쓴다거나 해서 의기투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또 누가 알겠나.”

- 본인이 만들고 싶은 욕심은 없나.
“노동영화 <카트>도 제작했고 지금은 애니메이션 <태일이>를 만들고 있어 당장 <파업전야2>를 떠올릴 만큼 여유는 없다.”

- 감독으로서 마지막 작품이 1998년작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다. 이후 제작만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연출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나의 정체성은 제작자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감독을 하고 싶어서 만든 작품이 아니다. 당시에는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는 너무 가볍다고 인식하더라. 다른 감독들한테 모두 거절당해 어쩔 수 없이 내가 맡았다. 갑작스레 감독을 맡아서 연출에 대한 부분은 아쉬움이 크다. 영화 자체가 가진 따듯한 정서나 스토리 때문에 좋았다는 관객을 만나면 반갑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는 부끄럽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연출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래도 아직은 제작자가 좋다. 제작은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할 수 있지만 연출은 쭉 한 작품에만 몰입해야만 하니까.”
 

▲ 정기훈 기자

"자본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왜곡
우리가 어리석게 살도록 만들어"
"잘못 생각했던 것을 깨닫고 성찰할 때 감동"


- 제작자로서 영화를 만드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지, 잘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지, 세 가지다. 얼마 전에 나온 <나의 특별한 형제>를 포함해 지금까지 40편을 만들었다. 내가 만든 영화 중에 4편을 뽑아 블루레이 스페셜 에디션을 만들었다. <공동경비구역 JSA> <바람난 가족> <건축학개론>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비용을 회수하지 못했는데도 들어갔다. 이 작품에 그것을 능가하는 매력이 있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늘 힘을 가진다."

- 가장 최근작 <나의 특별한 형제>는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그동안 만든 작품에는 소수자 이야기가 많다. 영화를 보면 인간의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 왜곡돼 있다. 자본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왜곡한다. 분단도 사람의 가치를 왜곡한다. 왜곡된 세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치인이 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나 예술의 몫이기도 하다. 감동은 그동안 잘못 생각했던 것을 깨닫고 성찰할 때 나온다.”

- 성찰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공부를 하는 것이다. 만약 노동에 모순을 느낀다면 그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한다. 보편적인 문제를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제기하는 것, 그 안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새롭게 발견도 할 수 있다.”

- 명필름에서 제작한 <카트>도 빼놓을 수 없는 노동영화다. 파업이나 노조가 매력적인 영화 소재는 아니어서 만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카트>를 만들기 전과 만든 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카트>를 만들고 손해를 봐서 회사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웃음) 들어간 비용을 회수하지 못했다. <카트>를 만들기 전 미국 영화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를 봤다. 부모가 FBI에 쫓기는 수배자여서 어릴 때부터 야반도주하고 전학을 수시로 하는 소년이 나오는 영화다. 고등학생인 그는 부모를 원망하면서도 참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삶의 진실을 놓고 가슴 아련한 부모와 자식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집사람(심재명 명필름 대표)이 송경동 시인 전시회에 갔다. 거기서 <카트> 원작인, 이랜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기록한 책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를 봤다. ‘아! 바로 이거다’ 싶어서 시나리오 작업을 해 놓고 잘 안 풀려서 넣어 뒀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직원이 이 시나리오를 보더니 ‘재미있는데 왜 영화를 안 만드느냐’고 묻더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다.”

장산곶매 <파업전야> 후속작 <전태일> 끝내 좌절
전태일 50주기 맞는 2020년 애니메이션으로 탄생


- 현재 또 다른 노동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엔 애니메이션이다. <태일이>는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가.
“장산곶매에서 <파업전야>를 상영하면서 1억원 넘게 벌었다. 그 돈을 사무실 보증금으로 넣어 놓고 다음 작품을 위한 팀을 꾸렸다. 학교 교육문제를 그린 '닫힌 교문'팀 '전태일'팀 '장기수 문제'팀 3개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닫힌 교문을 열며>만 만들었다. '전태일'팀이 사실 주력이었는데 시나리오를 끝까지 못 풀었다.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만들 때 만화책 <태일이>를 봤다. 그때 결심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성공한다면, 그래서 나한테 또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꼭 <태일이>를 하겠다고. 다행히 <마당을 나온 암탉>이 200만명을 넘으며 성공을 거뒀다. 그렇게 시동을 걸어서 결국은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만났다. <전태일 평전>이 가진 힘이 있고 진정성이 있지만 사실 전기 영화는 만들기 쉽지 않다. <파업전야> 직후에 젊은 시절 나는 그것을 결국 영화로 못 만들었지만 만화 <태일이>는 다르다. 좋은 감독과 훌륭한 애니메이션팀을 만났다. 운이 좋았다.”

- 2020년의 전태일은 어떤 인물일까 궁금하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전태일이 살았던 그때부터 지금껏 상황은 하나도 안 바뀌었다.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자꾸 잊는다. 무엇이 행복인지 태일이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우리 안의 ‘인간적인 맛’을 태일이를 보면서 끄집어내고 싶다. 엄마와 아빠와 아이가 같이 보면서 ‘그래~ 사는 건 저런 거야’ 하고 공감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영화 만들 수 있었던 이유
“동시대인과 소통하는 힘 있기 때문” 


- '영화'라는 사업장 노사관계로 보면 현재 '사용자' 위치에 서 있다. 영화제작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어떻게 진단하나.
“그동안 영화산업노조가 많은 일을 해냈다. 십수 년간 노력으로 영화제작 노동환경은 많이 개선됐다. 기본적으로 근로기준법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그러나 비용이 올라가는 측면에서 어려움은 있다. 그동안 주 52시간을 넘겨 일했기 때문에 바뀐 법과 사회적 환경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걱정하는 제작자도 존재한다. 영화산업은 주류 제작사의 독과점이 엄청나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다양성 훼손으로 영화 자체의 존립을 흔들 정도다. 그런데 8시간 노동이 가능한 곳은 그런 주류 제작사뿐이다. (정부 등에서) 지원 없이는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조건이다. 보통 영화 한 편을 만들 때 최소한 1억원 이상 비용이 든다. 그런데도 관객은 몇 천명 정도고, 회수하는 비용도 몇 천만원 수준에 그친다. 이런 조건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최저임금을 지키고 8시간 노동을 지키자고 하지만 답이 안 나온다. 영화를 끝까지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니까. 그리고 노동자로 볼 것인지, 아티스트로 볼 것인지 정리가 안 되는 부분도 있다. 어려운 문제다.”

-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노동자'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관객들이 현실적으로 <어벤져스>를 많이 보지만 본질적으로 <어벤져스>를 원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동시대인들과 소통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문제는 왜곡이다. 예컨대 우리 노동자들은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자본과 우리 사회 시스템은 그런 물건을 진열하지 않는다. 자기가 팔고 싶은 상품만 진열한다. <파업전야>를 만들고 30년이 지났는데 우리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가 고민하고 바꾸려고 노력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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